"있지도 않은 조류독감 때문에 농장을 폐쇄해야 할 지경입니다."
한 양계농가 주인의 '분노'처럼 '조류독감'이라는 말 한마디에 경북도내 닭 사육농가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계란과 닭값이 생산 원가에도 못 미치는 가격대로 폭락하고, 재고물량을 줄이기 위해 사육두수까지 줄여보지만 마땅한 대책이 없다. 도내현황은 7천229농가의 2천436만여 마리. 이들 농가는 원망과 분노 속에서 하루빨리 파동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분노의 양계농장
17일 오전 도내 최대 양계 사육단지가 들어서 있는 영주시 안정면 대평리. 농장입구엔 직원차량과 바리케이드, 외부인 절대 출입금지판이 어지럽게 늘어서 있었다.
양계 90만 수를 사육하고 있는 장용호(50) 씨는 대뜸 언론을 향해 불만부터 터트렸다. "발생하지도 않은 조류독감을 언론에서 무작위로 보도해 사육농가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다"며 "예방 차원이라지만 사실상 소비위축에다 가격폭락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고 하소연이다. 소백양계단지 손병원(70) 회장은 "재고물량을 줄이기 위해 사육두수를 줄여 출하량을 조절하고 있지만 가격이 떨어지고 있다"고 했다.
같은 날 김천시 어모면 옥계리 속칭 평성마을에 위치한 청솔농장. 병아리를 합쳐 산란용 닭 30만 수를 사육하는 이곳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농장 입구에서부터 외부인 차량을 통제하고 생석회로 신발을 소독하게 했다.
농장주 임영식(53) 씨는 "철저한 예방도 좋지만 국민들에게 불안감은 주지 않아야 할 것 아니냐"며 "지난해 초 조류독감 파문으로 인한 피해가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미 소비량 감소로 가격 하락세가 지난해 못지 않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경주 감포읍 에덴농원 정연화(51) 대표는 "지금 상황은 양계농들에겐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정부와 언론이 아무런 대책없이 위험하다, 수십·수백 명이 피해를 당할 수 있다는 공포감만 조성하고 있다"고 울화통을 터트렸다.
육계 7만 마리를 사육하고 있는 이균식(57·청도읍 원정리) 씨는 "지난해 초에도 조류독감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지만 지역에서 한 건의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며 "특히 김치 유산균이 조류독감 예방과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입증돼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류독감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닭 사육 농가들도 김치 유산균을 닭 사료나 물에 섞어 공급하면 조류독감을 예방할 수 있는 만큼 정부와 언론이 나서서 이런 것을 홍보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계란, 닭값 얼마나 떨어졌나?
산지마다 출하가격이 조금씩 다르지만 지난 12일 동남아 조류독감 발생, 14일 정부의 조류독감 예보발령 등으로 계란값과 닭값이 폭락했다. 최근 며칠 동안만 계란값이 3차례 내리면서 생산원가 이하로 떨어졌고 그나마 수요가 줄어 재고가 쌓이고 있다.
김천 청솔농장의 경우 계란값이 개당 120원에서 17일 현재 92원으로 떨어지면서 농가출하가격은 생산비 85원에도 못미치는 76원으로 떨어졌다.
소백양계단지도 사정은 비슷해 10월 초 특란기준 100원대의 가격이 최근 70원대로 폭락했다고 했다.
김천시 부항면 지좌리에서 15년째 육계 12만 수를 키우는 이수기(59) 씨는 "닭값이 지난주 kg당 1천500원에서 17일 현재 800~900원으로 떨어져 생산가인 1천200원에 크게 못 미친다"고 했다.
또 연간 3천만~4천만 마리의 신선육을 생산하는 상주시 초산동 하림CnF 도계공장은 조류독감 발생예보 이후 하루 10만 마리가 출하되던 것이 8만5천 마리로 줄어들었다.
문경새재 석수농장 김위식(57· 동로면 노은리) 씨는 "영지 특수 계란을 생산하고 있는데 조류독감 예보 발령 이후 1개당 103원씩 받던 계란 가격이 30원이나 떨어졌다"며 "중·소규모 양계장은 상인들이 소비 부진을 이유로 산지 매입을 피하고 있고, 멋대로 개당 35~40원까지 낮은 매입가를 제시하는 횡포까지 부려 농가들은 출혈 판매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에 따라 사료상도 덩달아 울상이다. 이정환(57·문경 대상사료특약점 대표) 씨는 "그동안 육계와 계란 시세가 좋아 사료도 잘 팔렸는데 조류독감 예보로 사료판매 부진도 벌써 닥치는 것 같다"며 걱정했다.
■농가는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나?
김천 청솔농장은 요즘 하루 2차례씩 계사 주변을 철저히 소독하고 항생제가 전혀 없는 사료만을 사용한다.
김천의 제일농장. 입구에서부터 소독약 냄새가 자욱하다. 산란계 8만 수를 키우는 농장주 이성연(64) 씨는 "35년째 닭을 키우지만 김천지역에선 전염병이 발병한 적이 없었고 발병할 우려도 없다"고 했다.
육계 4만6천 마리를 기르고 있는 상주시 청리면 청하리 부성농원의 이성희(56·상주 육계협의회장) 씨는 이제 알에서 깨어나 입식한 지 일주일도 채 안되는 병아리들에게 이상 징후가 나타나는지 하루에도 몇차례씩 들여다본다. 철새가 도래하는 시기에는 축사와 사료창고, 분뇨처리장 등에 그물망을 치거나 비닐로 포장하는 등 확실한 문단속을 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하루 한차례의 외부방역과 함께 자동 살포처리가 된 내부 방역시설을 하루 4차례씩 가동하고 있다.
경주의 경우 업계 내부적으로 정보공유와 긴밀한 연락망 구축을 통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으며 조만간 모임을 갖고 대비책을 마련키로 했다. 그러나 안강읍의 한 사육농은 "사육장 입구에 바리케이드 치고 소독기 설치해 방역작업하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는지 가르쳐 달라"며 체념의 목소리를 냈다.
문경새재 석수농장 김위식 씨는 계란의 판매가 장기적으로 부진할 것으로 예상하고 20일부터 4만4천 마리 산란닭 중 절반인 2만2천 마리에게는 당분간 사료와 물을 주지 않는 환우 조치에 들어가 계란 생산을 당분간 중단할 생각이다.
■대책없는 정부
6만 수의 산란닭을 키우고 있는 경주시 천북면 한진농장의 농장주 한진열(51) 씨는 "정부가 국민건강을 위해 조류독감 발생 가능성을 경고하는 것은 좋지만 대응책도 함께 밝혀야 할 것 아니냐"며 "계란이나 닭고기는 충분히 익혀 먹으면 탈이 없고 취급자는 손만 깨끗이 씻어도 전염 우려가 없다는 말은 왜 명확하게 해주지 않느냐"며 원망했다. 또 그는 "그렇게 위험한데 왜 일선 농가에는 예방약이나 예방·대응지침조차 내려보내주지 않느냐"며 누구로부터도 제대로 된 관련 정보나 대응방침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각 지방자치단체들이다.
김천시는 이미 지난 13일부터 생석회 20t을 닭, 오리 사육농가에 공급한 것을 비롯해 지난해 말부터 소독약(바이오크론) 3t을 농가에 무상 공급했고 다음달에도 2t을 추가로 공급할 계획이다.
상주시는 특별방역대책 상황실을 운영하며 조류독감 특별방역 대책에 따라 농장 주변의 사료나 깔짚, 기타 오염원을 제거하거나 소각처리하고 건물 천장과 벽 등의 먼지를 제거하는 등 청결에 만전을 기하도록 했다.
이동영 영주시 축산담당은 "농가에 그물망 설치, 철저한 축사 내부 소독 등을 요청하고 있고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통해 예보 사항과 농가행동 요령 등을 발송하고 있다"고 했다.
이창희·박정출·정창구·엄재진·마경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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