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1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두 해 전인 1917년, 경남 밀양군 무안면 성덕리에서 태어났다. 3남1녀 중 세째로 위로는 세 살 터울인 형이 둘, 아래로 열한 살 아래인 여동생이 있었다. 아버지는 싫은 소리 한마디 할 줄 모르시는 인자한 분이셨으나, 어머니는 강직한 성품으로 자식들이 어긋날라치면 곧잘 혼을 내셨다. 형제들 중에 큰형은 이북에 있어 지금 생사를 알길 없으나 둘째 형과 여동생은 아직 생존해 있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우리 형제들이 나와 같이 세상을 살아가니 이것도 복 받은 일이다.
조반석죽도 어렵던 시절, 우리 집은 대대로 내려오는 수백 석지기 부농이라 끼니걱정은 하지 않았다. 여섯 살이 되던 해, 경북 월성군 천북면 신당리로 이사를 갔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유년시절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난 몸이 약한 편이었다. 다른 식구들이 보리밥을 먹을 때도 매 끼니 쌀밥을 먹으며 자랐다. 당시에는 흉년이 잦아 아무리 넉넉한 집이라도 쌀밥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어머니는 밥을 잘 먹지 못하는 나를 위해, 아버지상에 올리는 쌀밥을 푸기 전에 늘 내 밥부터 먼저 푸셨다. 형제들이 시샘할 법도 했지만, 몸집이 작고 약골인 탓에 그리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그때 먹은 어머니의 정성이 보약이 되었는지 졸수(卒壽)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직 건강을 잃지 않고 있다.
아홉 살 되던 해, 월성군에서 하나밖에 없던 경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천북면에서 입학한 또래의 아이는 나 혼자였다. 동급생 중에는 자식을 여럿 둔 아버지도 있었고 큰형님뻘되는 사람도 많았다. 피죽도 못 먹고 사는 시절이었으니 그렇게라도 배우러 온 사람은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었다. 입학해서는 20리가 넘는 통학길을 형과 같이 다녔다. 첫새벽에 밥을 먹고 집을 나서면 2시간 남짓 걸어야 학교에 다다를 수 있었다. 형이 졸업하고는 학교 근처에서 혼자 하숙을 했다. 아버지가 이따금 쌀 두 가마니를 하숙비 조로 가지고 오셨다. 하숙생활을 일년여 했을 때, 아버지께서 자전거를 사주셨다. 어린 자식이 그리 지내는 게 안쓰러웠던 모양이었다. 자전거는 앉아서 다리가 닿지 않아 옆으로만 타고 다녔다. 그렇게 타고 다녔어도 자전거로 통학하는 게 흔치 않은 일이라 철없이 우쭐해 했던 것 같다. 점심도시락을 못 싸가는 날이면 청어(靑魚) 한마리로 배를 채웠다. 학교 뒤편에 1전을 주면 청어 한 마리를 구워 파는 집이 있었다.
반에서 3등 안에 들 정도로 학업성적이 좋았지만 매번 부급장만 했다. 급장에 대한 욕심으로 다소 의기소침해 있으면 아버지께서 "어이 급장" 하시면서 자식 기죽지 않도록 치켜세우시곤 했다. 동무들과 일년 중 유독 기다려졌던 날이 있었다. 크리스마스다. 그때는 크리스마스가 무슨 날인지 몰랐다. 단지 그날이 되면 학교에서 찹쌀떡을 한 개씩 줬는데, 나중에까지 그날은 찹쌀떡 먹는 날인 줄로만 알았다. 농번기가 되면 온 동네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일손이 부족하여 어린 아이도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우리 집에는 소를 세 마리 키웠다. 산으로 들로 소꼴 먹이러 다니는게 내 담당이었다. 여름 땡볕에 그을린 얼굴은 찬바람이 불어서야 제색으로 돌아왔다.
이제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차다. 이맘때 쯤이면 정성들인 곡식을 수확하는 농군들의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내 어린 시절 동네도 한해 중 이맘때가 제일 넉넉했었다. 나이 탓일까, 이 계절이 되면 아련한 기억의 얼굴들이 더욱 그리워진다.
화성산업(주) 이윤석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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