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제 도깨비시장을 아세요?

가게 안에 들어서자 쾨쾨한 냄새가 인상을 찌푸리게 만든다. 겨우내 꼭꼭 닫아두었던 봄 옷장을 열면 나는 냄새 같기도 하고, 오랜 시간 문을 닫아두었던 창고 안에 들어간 느낌도 든다. 옷 가게가 이래서야?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

하지만 이곳은 나름대로 멋과 개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찾는 패션거리다. 대구역 맞은 편에서 동아백화점 본점 사이에 들어선 이른바 '구제(舊製) 도깨비시장'. 말 그대로 남이 쓰던 물건을 재활용해 파는 옷가게들이 즐비한 곳이다.

10년 전쯤 한두 곳에 지나지 않던 구제품 점포가 2, 3년 전부터 급작스레 커지기 시작했다. 옛 자유극장 자리는 웬만한 아케이드 상가를 방불케 할 만큼 규모가 큰 구제상가로 변했고 인근 빵집, 귀금속점까지도 간판은 그대로인 채 구제의류 상가로 변했다. 매장내 각 코너까지 합치면 반경 200m 이내 구제품 상점만 300여 곳에 이를 만큼 거대한 시장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구제품 상점인 '돌도깨비' 석가화 대표는 "처음 호기심에 구제품 상가를 찾는 사람들은 구제 옷에서 나는 독특한 냄새와 산만한 분위기 때문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며 "하지만 가게 안을 한 번만 둘러보면 세상에 이런 요지경 백화점이 있느냐며 눈이 휘둥그레지고, 해외 명품까지 상상도 못할 가격에 판매되는 사실에 다시 놀란다"고 했다.

대구 구제품 시장은 규모면에서 볼 때 서울, 부산보다 크다는 것이 상인들의 말. 최근 개업했다는 한 상인은 "이곳에 자주 쇼핑을 나오면서 구제품 매력에 푹 빠졌다"며 "소자본 창업이 가능하다는 것이 구제시장의 장점"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판매되는 제품은 '북한 제품을 빼곤 다 있다'고 말할 만큼 다양하다. 주력 품목인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유럽제품 외에도 일본, 중국 등 아시아, 심지어 러시아산 털모자에 고가의 무대의상까지 없는 게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정도다. 구제시장의 가장 큰 매력은 평소 가격 때문에 엄두도 못내던 명품을 '헐값'에 이용할 수 있다는 것. 백화점 명품매장에서 수십,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의류들도 이곳에선 10만 원 안팎이면 살 수 있다. 말이 구제품이지 운이 좋으면 새 옷도 살 수 있다.

한 상인은 "흔히 말하는 '땡처리'를 통해 팔다 남은 제품들이 콘테이너로 국내에 유입되는 경우도 많다"며 "입다가 낡거나 단추가 떨어져서 버려진 옷들 사이에 이런 명품들이 간혹 끼어있는데 말 그대로 땡 잡는 셈"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거래되는 의류는 중간수집상을 통해 보통 무게 단위로 매입된다. 100㎏ 한 상자당 가격은 70만~150만 원 정도로 다양하다. 이탈리아산 등 고가 의류가 많이 수집된 상자는 비싼 가격에, 일본 등 아시아제품 상자는 그보다 싼 가격에 도매로 거래된다. 한 상자당 300벌~400벌씩 옷이 들어있기 때문에 한 벌당 가격은 평균 3천 원 정도. 상자 안에 어떤 제품이 있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도저히 상품가치를 매길 수 없는 옷들로 가득찬 경우도 있고, 가끔 모피가 끼어있는 경우도 있다. 모피 한두 점을 건지면 그야말로 '대박'인 셈. 하지만 상품 가치가 없는 옷가지도 많이 섞여있는 데다 세탁비까지 추가되면 한 벌당 원가는 훨씬 높아진다. 최근엔 구매비용이 다소 비싸더라도 상자 단위로 매입하는 대신 특정 메이커 또는 특정 제품군만 따로 선별해 구입하는 상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코너별 특성화도 요즘 추세다. 20대 층을 겨냥한 구제품만을 따로 판매하는 한 매장 주인은 "나 만의 개성을 찾는 대학생 고객들이 많이 찾는다"며 "이곳의 매력 중 하나는 고객이 구입한 옷이 단 한 벌밖에 없다는 점"이라고 했다. 구제품이다보니 사이즈가 다양할 수 없다. 몸에 옷을 맞추는게 아니라 옷에 몸을 맞춰야 한다. 디자인이나 메이커가 마음에 든다고 해도 사이즈 때문에 아쉬운 발길을 돌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렇게 발품을 팔다가 마음에 쏙 드는 옷을 만나면 그야말로 '감격시대'인 셈.

구제시장을 찾은 대학생 손모(23) 양은 "친구들과 시내 나오는 길에 꼭 들러서 둘러본다"며 "백화점처럼 최신 유행제품을 살 수는 없지만 평소에 입고 싶던 명품을 싼 값에 구입할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자주 찾는 편"이라고 했다.

지금도 구제 도깨비시장의 몸집은 점점 커지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매장 수가 늘어나고 그만큼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좋은 제품을 보는 안목을 키우는 것이 상인들의 첫째 요건. 한 상인은 "워낙 매장이 많아지다보니 매출액이 예전만 못하다"며 "좋은 구제품을 갖출 수 있는 능력있는 상인과 그렇지 못한 초보 상인 사이에 매출액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사진 = 대구역과 동아백화점 본점 사이에 형성된 '구제 도깨비시장'. 최근 3, 4년새 300곳이 넘는 점포가 들어설 만큼 시장이 커지고 있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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