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상 밖' 사람들-영덕군 지품면 내옥류리

마을 당목(木)으로는 경북 도내 최고 수령(樹齡)을 자랑하는 영덕군 지품면 신안리 느티나무를 지나 10여분쯤 달렸을까. 한때 전국적인 명성과 품질을 자랑했던 도계리 한지(韓紙) 공장에는 잡풀이 무성하다. 몇 년 전, 밀려오는 중국산 때문에 평생 해왔던 이 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던 주인의 푸념이 언뜻 떠오른다. 굳이 동네사람들한테 묻지 않아도 비바람에 찢겨 나간 창틀이며 내팽개쳐진 외관으로 보아 필경 문을 닫았을 터.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가 아직 그대로다. 얼마전만 해도 벌써 잘려 나가 최고급 한지가 됐겠지만.

한지공장에서 5km를 더 가니 내(內)옥류리가 나왔다. 해발 500m로 영덕군 내 204개 마을 중에서는 가장 높은 곳 중 하나다.

내옥류리에 있는 집은 모두 다섯 채. 동민은 모두 8명. 평생을 이곳에서 살고 있는 김만권(72) 씨 집을 중심으로 차분교(64·여), 강순희(77·여) 씨네 등 세 채가 있고, 좌우로 200여m 떨어져 김천정(66), 강신영(65) 씨네가 살고 있다. 수년 전까지 마을주민이던 김만권 씨의 아들 형문(40) 씨와 강순희 씨의 아들 권용수(41) 씨 부부는 영덕읍과 지품면 신안리에 살면서 농사를 위해 매일 이곳에 올라온다.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면서 대처로 나가 통근하고 있는 셈.

"30년 전만 하더라도 내옥류리에만 50여 가구가 넘게 살았었지." 옥류리에서 태어나 줄곧 이곳을 지키고 있는 김만권 씨는 우거진 풀숲 곳곳을 가리키며 "저기도 집터, 여기도 집터였다"며 회고했다.

"오는 길에 산짐승 분비물이 깔렸던데요"라는 말에 김씨는 "이 마을 농사는 산돼지, 노루 등 짐승과 농부가 반반씩 갈라먹는다"고 했다.

"짐승들이 뜯어 먹는다고 애타하지 말라는 건 어른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지. 애초 못 말릴 일을 속상해 하면 몸만 상하고 일도 안 된다는 것, 그걸 교훈이라 하나. 반은 짐승에게 줄 마음이 있지만 그래도 농사짓지 않는 것도 있어. 멧돼지 놈들이 몽땅 가져 가는 바람에 고구마는 아예 포기했어."

"떠나고 싶지 않으세요?" 어리석은 물음이었을까. 김씨는 단호하게 "입향시조의 묘도 있고 좋아서 그냥 산다"고 대답했다.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물과 산, 공기는 전국 최고야. 또 남의 소리 안 들으니 편하고, 남의 말 할 필요가 없으니 마음이 여유롭지." 왜 이런 오지에 사느냐고 하는 것은 단지 바깥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일 뿐 옥류리 사람들의 생각은 아니었다.

오후 4시. 옥류리에서의 해는 벌써 서산에 걸려 노루꽁지만큼만 남아있었다. 서서히 산그늘도 마을을 뒤덮는다. 22세 때 시집와 47년째 살고 있다는 김씨의 부인 남천돌(69) 씨가 군불을 서두르니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정겹고 애틋하다.

지금이야 어찌어찌 하루에 화물차 한 대 정도가 다니지만 길 나기 전 옥류리는 '울고 왔다가 울고 간다'는 말이 있을 만큼 오지 중 오지였다. 34세 때 남편을 일찍 떠나보내고 5남매를 이곳에서 키운 차분교 씨는 "아이들 안 굶기기 위해 숱한 고생을 했다"고 되뇌었다.

이제 내옥류리를 '앞산 뒷산에 빨래줄 매고 사는 두메마을'로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가구별 농가 소득도 영덕군 내에서 으뜸이다. 가을 송이 때문이다. 마을을 감싸안고 있는 국사봉과 텃별산, 당봉산 등에서 적잖게 송이가 나오고 있다. 주민들은 국공유림 송이는 공동 채취해 수익금을 공평하게 나눈다. 사유림도 적잖은데 5가구가 20여만 평의 산을 관리하고 있다. 송이 날 때 이 마을은 한달 동안 눈코 뜰 새 없다. 늘 말벗이 그리운 이들이지만 이때만큼은 낯선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리 달갑지 않다고.

김만권 씨는 "송이는 작은 소나무 주변에서 많이 나는데 이 일대 산의 소나무는 나이가 많이 든 탓인지 해마다 수량이 줄어든다"며 태산 같은 걱정을 쏟아냈다.

하늘 빼곤 온통 산인 이 마을은 겨울이면 날씨가 영하 20도까지 내려가기 일쑤고 겨울도 일찍 찾아온다. 그 긴긴 밤 그들은 뭘 하고 보낼까. 마을 사람들의 답변은 이구동성. 민화투와 텔레비전이 유일한 소일거리라는 게다. "대처엔 고스톱이 유행이지만 여긴 할망구들이 잘 몰라서 만날 민화투만 쳐. 청단, 홍단이 10원이니 시간 보내기 심심풀이 수준이지만 그것도 노름이라고 열 붙으면 밤 새울 때도 있어."

30분 넘어 거리에 사는 권복순 할머니(68)도 민화투 단골 회원이다. 옥류리만큼이나 첩첩산중인 축산면 조항리에 혼자 살고 있는 권 할머니는 사람 그리워 해지기 전 혼자 걸어 산을 넘어온단다. "하도 오래 부대끼다 보니 이젠 가족이나 마찬가지지 뭐." 이날도 해가 서산에 걸릴 즈음 권 할머니는 "오늘도 판 벌이나"하며 찾아왔다.

옥류리 주민들의 TV 시청 시간은 기록 수준. 온갖 프로그램도 훤하게 꿰차고 있었다. 하기야 도회지에는 술집이다 노래방이다 오락실이다 놀거리가 널려 있지만 이 첩첩산중 적막강산에선 오죽할까.

여러 두메마을이 그렇듯 옥류리에서도 위성안테나 없이는 전혀 텔레비전을 볼 수가 없다. "TV는 잘 나오나요"라고 묻자 김만권 씨는 "얼마전 박지성이하고 이영표하고 맞붙어 공차는 것도 봤는데 영표가 좀 더 나은 것 같더구만"이라며 해설까지 한다.

사방에 어둠이 깔릴 때쯤 김만권 씨네로 화물차 두 대가 도착했다. 한 대에는 방에 새로 깔 장판이 실려 있었고 다른 차에는 김치냉장고가 실려 있었다. 두메산중에 웬 김치냉장고? 그러나 어쩔 건가. 여기도 사람사는 곳인데…. 묻진 않았지만 김씨가 목돈을 투자하는 것으로 봐 아마도 며칠전에 끝난 가을송이 수매 대금으로 더 춥기 전에 겨울채비를 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이야기했다. 두메산골 생활은 마음 비우면 천당과 극락이 되는 반면 마음이 꽉 차 있으면 감옥이라고. 황량해진 마을을 한 바퀴 도니 이름 모를 새소리와 솔바람 소리가 섞여 들려온다. 청량하단 말은 이럴 때 하는 걸까. 영덕·최윤채기자 cychoi@msnet.co.kr

사진 : 해가 서산에 걸린 오후 4시쯤 군불을 때자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습이 고향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