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가에서-무진으로 떠나고 싶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지금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라는 문장으로 김승옥의 단편 은 끝을 맺고 있다.

1964년 발표한 이 소설은 이후 최인호의 소설 과 함께 1970년대 문학청년들의 감수성을 후벼 파놓은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다. 라는 정훈희 노래와 이라는 영화로도 각색되었던 은 마치 수채화 같으면서도 너무나 정밀한 묘사, 감성을 자극하는 언어로 빚어진 뛰어난 단편이다.

고향 무진으로 휴가여행을 떠나는 제약회사 상무인 나는, 버스에서 졸음을 맞으며 '햇빛의 신선함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를 섞어서 수면제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황당한 공상도 하면서, 고향 무진의 한없는 나른함, 그리고 안개와 여교사와의 정사를 얼개로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가장 세속적 삶의 편린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이 발표된 지 44년이 지난 지금에 새삼 작품성 운운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발표 당시에도 대중소설이라는 둥 시시비비가 많았지만 그러나 오늘날 재독해 보면 그런 평가는 무의미 할 따름이다. 다만 산업사회의 톱니바퀴에 끼여 있는 도시인의 삭막한 마음 풍경이 40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진배없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날 뿐.

일상에서의 탈출을 기도하는 모든 이들이 그 조차 실현 불가능 할 때 꿈꾸는 몽상. 그것이 작가 김승옥에 의해 으로 형상화 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작가만이 지니는 권한 아니겠는가.

아, 정말 무진 같은 곳이 있다면 그냥 떠나고 싶다.

박상훈 소설가·맑은책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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