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속이 답답하거나 머릿속이 복잡할 때 내가 좋아하는 자리를 찾는다. 산자락에 위치한 우리 동네는 작년까지 그린벨트로 묶여 있던 곳이라 집 주변에 그럴듯한 마트 하나 없다.
생선 한 토막, 배추 한 포기를 사기 위해 버스를 타고 서너 정거장 나가야 하는 도심 속의 시골 같은 곳이다. 그 대신 다른 동네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혜택을 누리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지척에 있는 산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연의 풍광에 흠뻑 취할 수 있다. 배낭 하나 짊어지고 한 시간쯤 산을 타다 보면 몸은 금세 땀으로 얼룩진다. 어느새 내 마음은 소나무 그늘을 향해 내달린다.
나무 밑에 앉아 숲이 내지르는 초록 내음을 온몸으로 흡입하면서 오이를 우적우적 베어 먹고 있노라면 머릿속이 말갛게 씻긴다. 그곳이 떡갈나무 밑이든 소나무 아래든 상관없다. 내가 좋아하는 자리는 그런 곳이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산을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동네 뒷산에도 매표소가 세워졌다. 그야말로 동네 뒷산인데도 전처럼 드나들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바빠진 일상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후로 나는 선뜻 산에 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전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것도 아닌데, 정액요금제니 하는 따위들에 알 수 없는 거부감이 일었다.
하루아침에 내가 좋아하는 자리를 잃어버린 격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얼마 전 마음에 드는 새 자리가 생겼다. 소나무 그늘보다는 못하지만 엉킨 머릿속을 쉬어가기에 그만하면 손색이 없다. 그곳은 번잡한 사거리 한 모퉁이에 있는 작은 도넛 가게다.
도넛 가게 이층으로 올라가면 통유리로 밖을 내다볼 수 있다. 홀 안에는 여러 개의 안락한 의자와 테이블이 있지만 나는 항상 통유리를 마주하고 앉는다. 통유리 너머로 내다보이는 풍경 때문이다.
그곳에 앉으면 손에 닿을 듯이 커다란 은행나무가 제일 먼저 손짓한다. 나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아껴 마시면서 유리 밖을 내다본다. 은행나무 옆으로 신호등이 서 있고 사람들은 쉴 새 없이 거리를 오간다. 무심결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람들의 머릿속이다. 어디서 저렇게 다양한 정수리와 가르마를 구경할 수 있겠는가.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선글라스 쓴 사람들의 감춰진 눈을 보는 일이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선글라스 뒤에 숨겨진 눈이 보인다. 정면에서 보는 것만큼 온전하진 않지만 감춰진 표정들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밖에도 도로변에 줄지어 서 있는 빈 택시들. 그 지붕에 내려앉는 쓸쓸한 가을볕. 떡볶이 파는 아주머니의 나른한 하품. 소국 다발을 실은 할아버지의 낡은 리어카. 내 마음은 어느새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닮아 간다.
요즘 사회 어디를 보나 자리다툼으로 시끄럽다. 국회에서건 기업에서건 서로 더 좋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못해 난리들이다. 이웃 간에도 자리다툼은 끊이지 않는다. 차를 서로 더 좋은 곳에 주차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좋은 자리에 연연해 하는 풍조가 비단 어제오늘 생겨난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높고 안락한 자리에 올라간들 죽으면 육신 하나 누일 손바닥만한 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한다. 요즘은 그것마저도 부질없음을 몸소 실천해 보여주는 지식인들이 늘고 있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자리는 마음먹기에 달렸다. 무작정 좋은 자리를 선망하기보다는 지금 내가 처한 자리를 좋아해 보는 것도 좋은 자리를 갖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단풍 빛이 날로 짙어진다.
우리 집 뒷산, 내가 좋아하는 그 자리들도 지금쯤 고운 옷을 갈아입고 있을 것이다. 단풍이 다 지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자리 하나쯤 마련해 보는 건 어떨까. 단풍나무 아래든 시끄러운 햄버거 가게 구석이든 커피 한 잔 아껴 먹을 수 있는 자리 하나 가져본다면. 이 가을에.
조영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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