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홍수 민주주의

불법 폐기물을 쌓아 두었다가 홍수가 날 때에 슬쩍 휩쓸려 가버리게 만드는 폐기물 처리법이 있다. 욕먹어 마땅한 수법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홍수 처리법'은 우리에게 익숙한 관행이다. 특히 그 어떤 사회적 홍수가 났을 때에 좋지 않은 것들을 일거에 해치우려는 습성은 한국 사회의 오랜 전통이다. 나는 그런 특성에 '홍수 민주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고 싶다. '홍수 민주주의'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일장일단이 있는, 한국적 특성일 뿐이다.

예컨대, 민주당 분당을 보자. 호남인들은 선거 때만 되면 목숨 건 것처럼 민주당만 사랑했다. 무더기 몰표를 줬다. 부끄러워하면서 준 몰표가 아니라 소신에 찬 몰표였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을 '호남당'으로 규정하면서 깨야 한다는 '홍수' 신호를 내리자, 순식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민주당에서 큰 호남 정치인들이 민주당에 '지역주의 기생정당'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개혁' 주문을 외워대자 호남인들도 열린우리당으로 쏠렸다. 처음엔 좀 멋쩍어 하긴 했지만 민주당이 복수심에 불타 헷가닥 하느라 대통령 탄핵을 하는 바람에 호남인들도 '개혁'을 떳떳하게 외칠 수 있게 되었다.

민주당, 문제 많았다. 평소에 그거 몰랐나? 알았다. 그거 바꾸기 위해 애썼나? 팔짱 끼고 구경만 했다. 홍수 날 때 한꺼번에 손보려고 그랬었나 보다. 호남인들에겐 성찰할 게 없었는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았다. 그러나 홍수 때문에 그 기회가 박탈당했다. 모든 죄악은 민주당의 몫으로 떨어졌다. 그것도 열린우리당으로의 대탈출이 일어난 뒤의 민주당이었다. 이 탈출자들에게도 성찰의 기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지난달 28일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노 대통령을 집중 비판했다. 이 또한 '홍수 민주주의'의 전형이다. 10'26 재선거 참패할 줄 몰랐나? 여당 지지율이 10%대로 곤두박질쳤을 때, 아니 지난 4'30 재'보선에서 '23 대 0'으로 전패했을 때, 무슨 대책이 나왔어야 했던 게 아닌가? 그러나 아무런 대책도 나오지 않았다. 다음에 '홍수'가 한 번 더 일어나길 기다렸던 모양이다. 노 대통령을 비판하기 이전에 왜 여당이 대통령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던지 여당 내부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에 대한 자성이 선행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노 대통령도 '홍수 민주주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내년 초에 자신의 진로에 대해 밝히겠다고 했다. 우리 사회의 갈등 과제 해결 방안을 제시하겠다고 했다. 안타깝다. 대통령의 진로라니? 그건 대통령에 취임할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는 건데 다시 밝혀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노 대통령의 모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노 정권의 주요 인사들은 한나라당에 대한 전투적 자세를 고수하면서 계속 갈등을 유발하고 있으며, 이는 노 대통령에 의해 암묵적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갈등 해소'를 부르짖으니 이를 어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홍수' 한방으로 모든 걸 해결해 보겠다는 심리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 이외에 달리 이해할 길이 없다.

노 대통령의 선의를 이해해보자면, 그는 '구조'의 문제에 집착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구조를 바꾸려는 자신의 애국충정을 몰라주는 국민에 대해 섭섭한 마음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갈등 구조엔 쌓여 온 역사라는 게 있다.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나가면 되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홍수' 한방으로 풀 수는 없다. 설사 그게 가능하다 해도 엄청난 부작용이 뒤따르게 돼 있는 만큼,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것보다 더 나을 게 없다.

우리는 '평소 실력'이 아니라 '벼락공부'로 성적을 올리는 학생을 칭찬하지 않는다. 벼락공부의 한계를 잘 알기 때문이다. 대통령 권력의 '소용돌이 효과'에 의한 변화는 벼락공부와 비슷한 것이다. 지금의 열린우리당이 그걸 잘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탈(脫) 권위주의'라는 큰 업적을 이룬 노 대통령이 국민과 더불어 같이 가려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의 선견지명과 같은 리더 십에 집착하는 건 모순이다. 대통령이 애국충정을 조금만 자제해 더디 가더라도 국민과 더불어 같이 뚜벅뚜벅 걷겠다는 발상의 전환을 하면 좋겠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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