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산책에 나선다. 대문에서 한 삼백오십보쯤 가면, 방앗간이었던 곳에 '패치워크 퀼트'라는 간판이 보인다. 형광이 밝혀주는 내부에는 온갖 색깔과 무늬의 예쁜 천들이 다양한 소품들과 함께 벽과 창에 드리워져 있다. 늦은 시간인데도 몇몇 여자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뭔가에 몰두하고 있다. 화려한 꽃무늬 접시 같다. 한 시간 남짓 후,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불빛은 새어 나온다. 저 여자들은 뭘 하지?
'패치워크 퀼트'는 '조각이불 만들기'라 할 수 있지만, 꼭 이불만 만드는 것은 아니라 한다. 서구에서 흑인 노예여성들이 바늘과 실로 천 조각을 누벼 이어붙이며 생활용품을 만든 것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흑인여성작가 엘리스 워커의 소설 '컬러 퍼플'이나, 위노나 라이더 주연의 비디오 '아메리칸 퀼트'는 이것을 서사구조로 원용한 아주 맛깔스런 작품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대체로 '퀼트 공간'을 남성 지배사회에서 여성들이 억압된 목소리를 찾는 공간으로 보고 있다. 천을 펼치고, 자르고, 누비고, 잇는 등의 수작업과 실타래를 풀듯 이야기를 병행하면서 삶의 애환을 해소하는 '위무 공간'으로 본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성들을 공적 담론으로부터 배제하는 '수동적 도피 공간'이 되어버릴 가능성을 그들은 우려한다.
패치워크는 고도로 집중을 요하는 만큼 재미도 상당하다고 한다. 또 천의 겉과 안을 누비면서 그려내는 실의 궤적은 동강난 여성들의 시간을 이어주고, 바늘의 반복 움직임은 파도의 리듬처럼 여성들을 몽환의 상태에 몰입시킨다고도 한다. 이런 여성 공간이 '열락 공간'임을 시사한다.
퀼트가 국내에 소개된 지도 좀 오래되었다. 요즘 퀼트방이 부쩍 늘어나고, 얼마 전 '퀼트 갤러리'까지 생겼다고 한다. 재미와 수익을 겸한 모양이다. 점차 공적 담론도 끌어들인다면, 알찬 여성의 시· 공간이 될 것이다. 방학엔 나도 화려한 접시 속, 꽃무늬 하나 되어야겠다.
정화식(대구대 겸임교수)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