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지하의 사상기행-(9)며느리가 한울님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崔時亨)선생은 도망 다니거나 동학의 진리를 가르치거나 하면서도 끊임없이 일을 했다. 억압받고 수탈당하고 온갖 형태의 질병과 두려움에 억눌려 끊임없이 굶주림 속에 쉴새없이 노동하는 농민들 속에서 그들을 조직하여 후천개벽의 새 세상을 열기 위한 동학 종단조직에 40년을 지하에서 보냈다. 진리를 가르치고 동학을 선포하고 종단을 조직하는, 농민들 속에서 사는 그 시간 이외에 자기의 조그마한 여가가 날때에도 조금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새끼를 꼬거나 짚신을 삼거나 여러 가지 일들을 했다. 만약 한자리에 앉아서 짚신을 다 삼았는데 새끼나 짚이 남아 있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풀어서 또 새끼를 꼬거나 짚신을 삼고 했다. 그럴 때마다 제자들은 "좀 쉬시지 않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십니까?" 하고 물었다. 최해월 선생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했다. "한울님도 쉬지 않는데, 사람이 한울님이 주는 밥을 먹으면서 손을 놀린다면 한울님이 노하신다."

동학의 기본 진리는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바로 한울님'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바로 한울님이 되는 것은, '일하는 한울님의 그 일을 사람이 한다'는 바로 그 점을 통해서 그리 되는 것이다. 일을 통해서 사람은 한울님이 된다. 일을 통해서 사람은 바로 한울님인 것이다. 일을 통해서 한울님은 바로 사람 속에서 일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하는 사람만이 가장 한울님다운 한울님이며, 일을 하는 사람만이 가장 생명의 본성에 알맞은 생명활동을 하는 생명주체이다. 일이야말로 가장 한울님다운 존재규정이며 가장 생명다운 생명의 활동규정이다. 한울님을 우리가 모신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안에 한울님을 모신다는 것은 일하는 한울님을, 우리 스스로 일함으로써 한울님의 일을 모시는 것을 말한다. 즉, 일 속에서 일을 일답게 살아 있는, 일함 속에 살아 있는 형태로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적인 본성대로 쉴새없이 일하고 쉴새없이 천변만화함으로써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은 따라서 한울님이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다. 사람은 처음도 없고 끝도 없고 가도 없고 닿는 곳도 없는 무변광대하고 영생불멸인 그 생명이며 쉴새없이 변화하고 쉴새없이 운동하는 바로 그 근원적 생명이기 때문에, 사람은 일을 하는 것이고 일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은 일을 통해서 한울님이며 한울님은 일을 통해서 사람인 것이다.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같이 하라"는 것은 일하는 사람 섬기기를, 끊임없이 일하고 창조하는 한울님같이 일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일하는 사람을 섬기라는 말이다.

최해월 선생이(1870년대라고 생각된다) 청주 변두리에 있는 측근 신도였던 서택순의 집을 지나다가 무척 무더운 삼복 더위에 그 집에 들러 찬물 한 그릇을 청했다. 서택순이 찬물을 드리자 물을 마시는 중에 조그만 창이 하나 나 있는 새카만 골방 또는 광 같은 곳에서 '덜커덕덜커덕' 베짜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를 짜는 이는 틀림없이 그 집의 며느리였다. 최해월 선생은 그때 서택순에게 "지금 자네 며느리가 베를 짜는 것이냐, 한울님이 베를 짜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지금 자네 며느리가 베를 짜는 것이냐, 한울님이 베를 짜는 것이냐"라고 물었다. 이때 서택순은 아무 대답도 못했으며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며칠 뒤에 청주에서 몇 사람의 신도들을 모아놓고 말씀하는 중에, "내가 이리이리 이런 소리를 듣고 이리이리 이런 물음을 던졌는데, 그 물음에 대해서 서군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디 서군뿐이겠는가. 모든 사람이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한다. 베를 짜는 며느리가 바로 한울님이니, 베짜는 그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며느리를 일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계신 한울님으로 알고 한울님으로 섬겨라"라는 뜻의 말씀을 하셨다.

생각건대, 1870년대는 국내외에 엄청난 불안과 공포 그리고 어두움만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씨조선의 가부장제적·주자학적 지배 밑에 모든 민중이 고통받고 억눌리고 빼앗기고 있을 때,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에 대한 공포 때문에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을 때, 그러한 처지의 며느리, 여성들은 신분제와 노예적 노동과 성차별 등 온갖 형태의 고통, 멸시, 천대 속에서 살았다.출산의 고통과 그들을 먹여 살리는 생계노동의 어려운 질곡 속에서, 맨 밑바닥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들에겐 이름도 없었으며, '밥상공동체'에 참가할 수 있는 권리도 없었다. 온 식구가 먹다 남은 찌꺼기들을, 부엌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깨진 바가지에 마치 꿀꿀이죽이나 돼지밥과 같은 상태의 허접쓰레기 음식들을 겨우겨우 얻어먹고 사는 처지였다. 새벽같이 일어나 샛별이 뜰 때 일을 시작해서 노을이 다 타고 남은 해거름에나 겨우 집으로 쩔룩거리며 돌아와 밥을 짓고, 어린아이를 돌보고, 그리고 밤에는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깊은 밤에는 남편의 성유희의 노예로서 시달렸던 것이다.

가족공동체의 경우에 며느리는 여성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천대받고 구박받는 위치에 있었다. 바로 이와 같이 온갖 고통과 온갖 천대와 멸시와 온갖 소외와 중노동, 그리고 성적인 학대와 출산의 고통과 신분적 천대 속에 있는 그 며느리를, 한울님이라고 부른 최해월 선생의 말씀과 사상은 가위 '혁명적'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만이 아니라 천지만물이 다 한울님을 자기 안에 모신 존재라고 동학은 가르친다. 천지만물이 풀, 벌레, 짐승, 흙, 물, 공기, 바람까지도, 티끌까지도 다 '그 안에 한울님을 모셨다'-'시천주'했다(한울님을 자기 안에 모셨다)-이렇게 얘기했을 때는 한울님이 아닌 것이 이 천지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울님인 사람이 한울님인 쌀을, 한울님인 닭과 한울님인 소를, 쇠고기를 어떻게 먹을 수 있겠는가?"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최해월 선생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천지만물이 시천주 아님이 없나니(즉, 한울님을 안에 모시지 않은 것이 없나니), 그러므로 사람이 다른 물건을 먹는 것은 한울이 한울을 먹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한울이 한울을 먹는다' '생명이 생명을 먹는다' 하는 것은, 생명은 끊임없이 일하고 창조함으로써, 끊임없이 어떤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킨다는 것(생명은 끊임없이 일하는 것을 자체 본질로 한다. 따라서 생명은 스스로 움직여서 다른 단위 생명체와 접촉하는 것이다. '노동'이란 곧 어떤 생명이 다른 생명과의 접촉을 통해서 어떤 또 하나의 생명을 창조해내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탄생된 새로운 생명체가 본래 적극적으로 그 생명을 움직이고 일을 통해서 다른 생명체에 접촉을 시도했던(가했던), 좀더 적극적인 생명활동의 주체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말한다.

동시에 모든 생명체는 그 성장과정에서 자기의 종(種)을 유지·발전시키고 유지·보존할 수 있는 종자를, 씨앗을 생산해 내며 그 씨앗을 중심으로 해서 수많은 여백을 창출한다. 비 온 뒤에 솟구쳐오르는 무성한 풀들의 무수한 성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열매를 맺기 위한 종을, 씨앗을 보존하기 위한 필요이상의 무한히 많은 풀들을 자라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여백이다. 타생명체는 바로 이 생명체의 '씨앗'이 아니라 바로 그 '여백'에 관여하는 생명적 접촉활동을 통해서 노동하는 것이며, 그 노동을 통해서 그 여백을 자기 먹이로서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나 '도태'의 원리가 아니라, 또는 서양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정복'의 의미가 아니라, '채취'의 의미가 아니라, 본래 생명의 진리에 따라 자연 속에 주어져 있는 '먹이사슬'의 원리와 '공생과 상부상조'의 원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한울이 한울을 먹는다'는 것은 '생명이 생명을 먹는다'는 뜻이며, '생명이 생명을 먹는다'는 것은 한 생명이 다른 단위 생명체의 둘레, 즉 여백에 관여하는 형식을 통해서 그 여백으로부터 자기의 먹이를 얻어서 먹고 또한 자기의 씨앗을 보존, 유지하며 씨앗 둘레에 풍부한 여백을 또한 산출함으로써 또 다른 단위 생명체로 하여금 그 여백으로부터 그 생명체의 먹이를 획득하게 하도록 개방하는, 그러한 연쇄적인 고리와 고리의 연결-그 연결을 기본 내용으로 하는 '생명체의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먹이사슬의 원리'이다. '한울이 한울을 먹는다'는 것은 '먹이사슬'의 원리이며 '공생'의 원리이다.

■김지하 시인의 공개 대중강의='일하는 한울님'을 주제로 15일 오후 2시 영남대 인문관 강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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