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당신 영어 형편없어!"

난감했다. 분명히 탑승 확인을 했다고 해도 계속 딴소리다. 무언가 착오가 있는 듯하다. 이럴 땐 대차게 나가는 수밖에 없다. 목청을 높였다. 그제야 터번 쓴 인도인 항공사 직원은 마지못해 보딩 패스를 건넨다. 이어 "Your English Is Very Poor!(당신 영어 형편없어!)"라고 한마디 툭 던진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욕은 왜 금방 들리지.

1998년 외환위기 직후 터키 이스탄불에서 홍콩으로 가는 경유지 두바이 공항에서 필자가 겪은 경험담이다. 해외 취재나 여행을 떠날 때마다 후회하곤 한다. 진작 영어 공부 좀 해둘 걸. 참 누군가는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말라'고 했지. 공부 안 하고 잘할 방법이 있다면 왜 안 하겠는가.

한국인에게 영어는 거의 콤플렉스다. 중'고교와 대학 졸업 이후는 물론 평생을 따라다니는 고민거리다. 조기 유학 열풍과 기러기 아빠 엄마 양산도 영어 때문이다. 더욱이 문법과 독해 위주로 영어를 '공부한' 세대에게 말하기와 듣기는 거대한 장벽이다. 나름대로 듣기와 말하기를 연습해도 일상적으로 영어를 사용하는 환경이 아닌 경우 곧 잊어 버리기 십상이다. 때문에 영어 사용 국가에 가더라도 2, 3일은 지나야 귀가 적응된다. 짧은 일정이면 말문이 열리려는 찰나, 돌아와야 한다.

정부가 인천과 부산'진해, 광양 경제특구와 제주 국제자유도시에서 영어 공용화를 추진하면서 찬반 논란이 치열하다. '보수 도시' 대구시도 국제화 추세에 발맞춰 외국인학교 설립과 '영어마을'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영어마을 조성은 각 지자체마다 앞다퉈 나서고 있다. 여기에 차기 대구시장을 노리는 모 국회의원은 영어를 대구시의 준공용어로 하자고 제안했다. 영어 공용화에 대한 찬반 논란이 거세자, 한 발 빼 준(準)자를 붙인 모양이다. 대구는 내륙 도시인 데다 땅값도 비싸고, 비교 우위에 있는 인프라도 없다. 따라서 우수 인력 양성과 함께 영어 공용화로 한국 투자의 가장 큰 난관인 의사 소통 문제를 해결해 외자를 유치하자는 취지다.

대구시민들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고 외국인들이 몰려올까. IT 분야에서 인도인들은 어디서나 환영받는다. 한때 대구 지역 IT 업계도 인도인 기술자를 영입하려고 했을 정도다. 인도 뱅갈로르 지역에 세계 유수의 IT 기업이 몰려든 것도 인도인들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저렴한 임금에다 뛰어난 기술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인도인들이 영어에 능통하다고 해도 IT업계가 필요로 하는 기술이 없다면 인도인들을 채용하겠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해외 출장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당시는 외환위기 직후여서 달러 값이 워낙 비쌌다. 통역을 붙인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래서 국내 상사의 현지 지사 직원이나 수출 에이전트의 도움을 받았다. 그마저도 힘들면 짧은 영어 실력과 '눈치코치'로 취재에 나서야 했다. 꼭 확인해야 하지만 들리지 않는 말은 필담(筆談)으로 해결했다. 궁하면 통한다. 궁즉통(窮則通)이 모든 난관을 해결해주었다.

홍콩에서도 영어가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주말이나 휴일이면 홍콩의 공원이나 쇼핑몰, 심지어 거리에서까지 필리핀 여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는 모습이 목격된다. 홍콩 각 가정에서 일하는 필리핀 가정부들이다. 동행한 모 상사 현지 직원은 농담을 던졌다. "필리핀 여자들은 영어가 되니 가정부라도 하지, 한국 여자들은 쓸 데가 없어요." 당시 달러 한 푼이 아쉬운 때였으니 농담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필리핀은 지금도 해외 송출 인력이 모국으로 송금하는 달러가 외환 보유고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현재의 필리핀을 부러워하는 나라는 없다. 영어 공용화가 만병통치약이 아닌 증거다. 영어도 중요하나 지식기반 초일류 기술 확보가 한국은 물론 대구의 미래를 좌우하지 않을까. 영어는 꼭 필요한 사람만 열심히 '공부'하고… English가 Poor해도 부끄러워하거나 기죽지 말 일이다.

조영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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