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우리 시대를 이끈 미술가 30인

우리 시대를 이끈 미술가 30인/ 윤범모 지음/ 현암사 펴냄

저자의 약력은 화려하다. 뉴욕대 대학원 예술행정학과 수학, 호암갤러리·예술의 전당 미술관·이응노미술관 개관 주역, 월간 '가나아트' 편집주간, 한국근대미술사학회 회장….

화려한 경력만큼이나 저자의 비평활동은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4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미술비평으로 작가와 함께했다. 저자는 그 기간이 "항상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때로는 불쾌감을 안고 쓸쓸히 돌아선 적도 있었다. 작가라 해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면서 필요 이상으로 적을 많이 만들기도 했다. 토론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한국의 미술계에서 비평활동하기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저자의 비평활동 화두는 '탈외세'와 '탈보수'다. '서구화라는 강풍과 맞서면서, 옛것만이 최고라는 보수주의와 맞서면서' 보냈다. '우리 나름의 형식과 내용이 곧 국제무대에서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첩경'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그런 저자가 자기 목소리가 또렷하고 비교적 '토종'에 가까운, 그러나 국제 무대에서도 결코 손색이 없는 작가 30인에 대해 적은 글들을 모은 것이다. 우리 미술계에 대한 원론적인 문제 제기와 현장비평 성격의 글, 우리 근대미술에 대한 연구보고서, 전시평, 불교미술 관련 글, 민족과 세계를 염두에 두고 집필한 글들이다.

저자의 독특한 비평관은 우리나라 근대기 최초의 여성 유화가 나혜석으로부터 시작한다. '사건의 연속 속에서 살았던' 나혜석의 삶은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과도 같았다. 도쿄 유학과 열애, 애인의 요절, 기혼남과의 결혼, 애인 무덤으로의 신혼여행,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만주생활, 부부동반 세계일주 여행, 파리에서 최린과의 염문, 이혼, '이혼고백서'(1934) 발표, 정조유린 관련 소송, 방황, 행려병자, 쓸쓸한 별세가 그녀가 남긴 족적이다. 그러나 저자가 주목한 것은 예술가로서의 나혜석의 삶이다. 나혜석은 생활이 구차할지언정 친일과 훼절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끝까지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오직 자신의 예술이라는 성을 쌓기 위한 행적'을 쌓았다. 좁게는 여권, 크게는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위한 선구자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응노와 박생광은 또한 어땠을까? 저자는 두 사람이 우리 시대의 문법에 충실하면서도 국제적으로 높이 인정받은 참다운 예술가로서 수난과 분투의 세월을 거부하지 않은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저자는 불운한 작가들의 세계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송영옥, 조총련계 재일교포 화가로 출품한 그림을 스스로 지우고 그 위에 새롭게 작품을 그렸던 특이한 화가. 저자가 직접 대담을 나누고 확인한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술의 상품화에 온몸으로 저항한 전사였다. 앞뒤 꼽추로 가난과 신체적 불구를 잊기 위해 그림을 그렸던 손상기의 그림도 마찬가지. 저자는 동시대에 고통받는 민중의 삶까지 껴안으려 했던 그의 고뇌가 드러나는 작품들을 점검하고 있다.

이 밖에도 저자는 동서양화(저자가 보기에 한국인이 한국적 정서를 기반으로 제작한 그림은 모두 한국화라고 보고 있다)를 막론하고 다양한 작가들의 면모를 소개하고 있다. 끝없는 정진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전혁림·이만익·이종상·박대성·이왈종·오용길·이화자 등 중견화가도 있다. 민중미술판에서 현실주의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표명했던 신학철·임옥상·홍성담·김봉준·황재형·최병수·이철수·김호석의 근황도 빠지지 않았다. 현대미술가 권순철·최동열·오원배·강경구·김선두·서용·유영교·강대철·한진섭 등의 고뇌와 다채로운 표현의 세계도 맛볼 수 있다.

30편에 이르는 미술 비평에 머리부터 아파 오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그런 걱정은 털어버려도 괜찮을 듯싶다. 저자의 필력은 현학적이고 알아듣기 힘든 용어들로 가득한 비평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아주 편안하고 재미있고 읽기 쉬운 비평으로 되어 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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