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정리를 하다가 손톱 두 개가 부러졌다. 영양이 부족한지 조금만 자랐다 싶으면 별스럽지 않은 일에도 손톱이 자주 부러지곤 한다. 부러진 손톱을 떼어내고 보니 손톱 밑에 피멍울이 맺혀 있다. 키보드를 치다가도, 사물에 무심코 손끝이 닿을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지러지게 놀라게 된다. 호호 불어도 보고, 찬물에 넣어 봐도 보호막을 잃은 손톱은 약이 오를 대로 올라서인지 쉽게 아픔이 가시질 않는다. 세상에 의미 없는 존재는 없는가 보다. 평소 하찮은 것이라 여겼던 것도 다 제 역할과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얼마 전 책을 소개하고 저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TV프로그램에서 반가운 얼굴을 보았다. 영문학자이자 에세이스트인 장영희 교수. 어릴 적 소아마비로 인해 두 다리가 불편한데다 현재는 암투병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밝고 건강해 보이는 그의 모습도 반가웠지만, 대화 도중 손을 올릴 때마다 손톱 끝에 남아있는 봉숭아물이 인상적이었다. 매사 열정적이고 긍정적인 그의 성정이 엿보여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손톱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 조그만 손톱에도 봉숭아 꽃물과 관련된 소중한 추억이 깃들어 있다.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땐 연례행사처럼 약지와 새끼손톱에 항상 봉숭아물을 들이곤 했다. 저승길을 밝혀준다는 속설 때문인지 할머니는 봉숭아 철만 되면 '꽃물 들이기'를 기다리셨고 그 담당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백반을 넣어 찧은 봉숭아를 손톱에 올리고 물들길 기다릴 때마다 젊으니까 꽃물도 곱게 든다며 할머니는 손녀의 여린 손톱을 질투하셨다. 그런데 할머니는 정말 붉게 물든 손톱 끝을 호롱불 삼아 어두운 저승길을 걸어 가셨을까?
첫눈이 올 때까지 봉숭아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었다. 사춘기 시절 손톱이 다 자랄 때까지 첫눈이 안 내리면 어쩌나 꽃물이 초승달처럼 가늘어진 손톱 끝을 바라보며 조바심쳤던 기억은 나건만, 못되어도 몇 번쯤은 봉숭아물과 함께 첫눈을 맞았을 텐데 정작 가슴 떨리던 첫사랑의 얼굴은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부러져 못생겨진 손톱을 들여다보면서 잊힌기억을 추억한다. 내 신체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처럼 오래도록 손톱을 쳐다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제 손톱은 매일 조금씩 자랄 것이다. 아픔은 둔감해질 것이며, 다시 손톱이 부러지는 걸 경험할 때까지 손톱의 소중함 같은 건 망각될 것이다. 그렇게 일상이 지나간다.
정일선(경북여성정책개발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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