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늦가을 숲에서

속담에 '봄볕에는 며느리 내보내고 가을볕엔 딸 내보낸다' 했던가. 봄볕은 잠깐동안에도 살갗을 그을게 하지만 가을볕은 그저 살짝 와닿고 갈 뿐인 예쁜 햇살이라는 뜻이겠다. 사실 과학적 근거가 있는 말이다. 낮이 긴 봄엔 일조량도 많고 자외선 지수도 높지만 가을엔 일조량도, 자외선 양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가을 햇살을 담뿍 받으며 걷다보면 뼈에 좋은 비타민 D도 팍팍 생겨나고, 아토피 피부엔 치료 효과도 있다 한다.

11월도 끝자리다. 아침저녁으론 겨울 내음이 묻어난다. 산에 오르기 좋은 때다. 사방 녹(綠)의 천지인 여름산도, 화려한 단풍철의 골짜기도 좋지만 이맘때의 산도 참 근사하다. 늘푸른 나무들과 잎지는 나무들의 콘트라스트가 나날이 또렷해지고 있다. 숲 사이로 햇살 한줌씩 쏟아져 들어오면 빛과 그늘이 이루는 명암 또한 가히 환상적이다.

그토록 화려함을 자랑하던 나뭇잎들은 언제 그런 날이 있었더냐는 듯 바싹 마른 가랑잎이 되어 누워있다. 빈 가지뿐인 나목(裸木) 숲엔 욕심을 털어버린 뒤의 맑은 고요만이 남아있다. 나목들을 보고 전성기가 지나간 사람처럼 허허롭게 보는 건 속인(俗人)의 어쩔 수 없는 속물근성 탓이겠지.

한 시인이 색다른 경험을 했다. 가상 죽음 체험이다. 영정사진을 찍은 뒤 수의를 입고 밤중에 산 중턱까지 가서 거기 놓인 관 속에 들어갔다. 누군가 관 뚜껑을 덮고 못 치는 의식을 할 땐 심장이 딱 멎는 것 같더라고 했다. 그 체험 후 그녀가 말했다. "수의엔 주머니가 없더군요. 인생이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란 의미겠지요."

절집에선 겨울 채비가 한창이다. 빗자국이 선명한 흙마당 한편 우물가에선 김장을 도우러온 아낙들이 부지런히 절인 배추를 씻고 있다. 햇볕바른 툇마루엔 무 말랭이가 말라가고, 한 귀퉁이에선 스님들이 메주틀을 밟고 있다. 산사의 늦가을 풍경은 그대로 그림이고 시다. 돌아나오는 길손의 귀에 와닿는 한 아낙의 정겨운 부름, "저녁 공양하고 가이소!" 밥때이니 저녁이나 들고 내려가라는 말, 산 아래서는 듣기 힘든 말이다. 마음이 환해진다.

우리 시대의 명배우 폴 뉴만은 "항상 마지막 영화라는 생각으로 촬영에 임합니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살벌한 할리우드에서 그 자신을 '명품'이 되게 만든 비결인가 보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아예 하지 않는 사람, '진짜 마지막'에 가서 큰 차이가 있지 않을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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