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가에서-'빨리 빨리'로 배우는 책의 미학

동남아 관광지를 여행하다 보면 현지인들이 서투른 발음으로 '빨리 빨리'를 외치며 호객하는 것을 보고 고소(苦笑)를 금할 수 없다. 우리네 성정(性情)을 단적으로 희화한 풍경이기 때문이리라.

사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든지 '빨리 빨리'가 입에 붙어 조급증을 부리는 것이 오늘날 한국인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빨리 빨리'에도 되는 것이 있고 안 통하는 것이 있는 법.

전 세계적으로 읽히는 '리더스 다이제스트'라는 잡지가 있다. 미국에서 1922년 2월 D.월리스가 창간한 이 잡지는 세계의 중요 잡지나 단행본에서 흥미가 있는 것을 골라서 요약 소개하는 것으로 성공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음식으로 치자면 인스턴트 식품과 같다고 할 것이다. 시간에 쫓기며 사는 현대인들에게 시간을 절약하며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는 매우 훌륭한 아이디어인 셈이다.

'레미제라블' 같은 책을 독파하는 사람이 드문 요즘이다. 굳이 책을 보지 않아도 비디오 한 편이면 장발장의 기구한 운명이 펼쳐지는 스토리를 뚜르르 꿰뚫을 수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 까닭에 책을 만드는 사람들도 독자의 기호에 맞추려고 가급적 '빨리 빨리'가 통하는 편집 방향을 선택하고 비주얼 디자인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 '빨리 빨리'가 결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독자나 책을 만드는 사람들 모두 알고 있다.

한 단어 한 단어 씹어가며 다독다독 빠져드는 독서의 세계를 열어줄 의무가 책을 만드는 사람에게도 있지만, 독자들도 결코 면피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빨리 빨리'가 능사가 아닌 것도 함께.

박상훈(소설가.도서출판 맑은책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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