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제주의 산-오름

그대, 제주의 숨은 모습을 보고 싶은가

'제주도를 알려거든 오름을 올라라.' 이 말만 믿고 제주의 대천동과 성산읍 수산리를 잇는 도로를 달린다. '오름'으로 가는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칡오름, 민오름, 아부오름, 높은오름, 동검은이오름, 백약이오름, 좌보미오름. 정다운 이름의 오름들이 이어진다. 제주 동부 오름군락의 높낮음과 오름이 만들어내는 자체의 다양한 곡선이 아름다운 곳이다. 그 곡선 속으로 내달리는 직선도로는 도형의 세계로 빠져드는 지름길. 좌우로 둥근 오름을 품고 쭉 뻗어나간 도로는 호방하다.

11월말. 그러잖아도 이즈음 제주도는 해안도로보다 한라산을 관통하는 도로들이 더 운치 있다. 육지는 벌써 영하의 초겨울. 하지만 제주도는 이제야 비로소 가을풍경이다. 그 중에서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운 풍경을 꼽으라면 단연 백약이오름. 정상에 굼부리(화산이 분출되면서 생긴 큰 웅덩이)를 품은 생김도 생김이지만 백가지 약초가 자생한다고 하여 붙여진 특이한 오름이다.

눈대중으로 지도를 보고 백약이오름 앞에서 차를 세웠다. 오름은 표지판이 없기 때문에 내비게이션도 무용지물. 등산로가 있긴 하지만 외면했다. 자유. 내가 가는 곳이 길이 아닌가. 국그릇을 엎어둔 것 같기도 하고 멀리서 보면 신라나 대가야의 왕릉 같기도 하다. 그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오름을 오른다. 초입은 생각 외로 가파르다. 숨을 고르며 오르길 20여 분. 노란 개민들레가 보일 즈음이면 오름의 정상이다. 털썩 주저앉는다. 피곤함 때문이 아니다. 황홀하다. 몇 번의 제주도행 끝에 처음 오른 오름. 왜 이제야 오름을 올랐을까하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그동안 숱하게 제주의 겉만 훑고 돌아가지 않았던가.

탁 트이는 시야. 남쪽으로는 성산일출봉이 아스라이 보인다. 해안가를 돌며 봤던 관광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눈에 밟히는 것이라곤 전신주와 뻗은 도로뿐. 드문드문 놓인 산담(무덤을 네모 모양으로 둘러싼 돌담)도 이젠 풍경이 되어버렸다.

찬바람이 옷깃을 헤집는다. 정신을 차리면 넓은 분화구가 정상에 있다. 둘레가 1천500m, 깊이 49m로 제법 큰 화산체다. 내부는 완만한 곡선. 내려가봐도 좋지만 분화구의 트랙을 한바퀴 돌며 제주의 늦가을을 감상하는 편이 낫다. 오르락내리락, 오름 정상의 물결 같은 길을 걷다보면 왜 이 지역이 오름의 천국인지 실감할 수 있다. 좌보미 오름이 눈앞이고 '이재수의 난'을 촬영했던 아부오름과 동검은이오름도 지척이다. 풍경이 평화롭다. 그렇다. 제주의 멋은 관광명소에 있지 않다. 제주의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은 오름에 있다.

▶오름이란?

제주도를 여행할 때 산이나 언덕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오름이다. 화산활동으로 생겨났다. '오르다'의 명사형으로 분화구를 갖고 있고 내용물이 화산 쇄설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화산구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을 말한다. 제주도엔 386개의 오름이 있다. 그중 관광지로 개발된 곳이 산굼부리 한곳이며 나머지는 자연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대개 출입이 가능하지만 아부오름처럼 사설 목장안에 있는 것은 철조망을 둘러놨다. 오름의 아름다움이 소문나면서 오르는 사람이 늘어났지만 관리가 안돼 일부에선 훼손을 우려하기도 한다.

▶백약이오름 찾아가는 길=제주에서 97번 도로를 타고 표선 방향으로 향한다. 제주도 내륙의 중간쯤 대천동네거리가 있다. 이곳에서 구좌읍 쪽으로 좌회전해서 1112번 도로로 3㎞를 가면 삼거리. 송당목장을 끼고 수산2리 표지판을 따라 우회전한다. 2.9㎞를 더 가다 남제주군 표지판을 보고 빈터에 차를 세운다. 표선면과 구좌읍 경계지역이다. 오른쪽으로 100m를 걸어가면 '소황금자생지'라는 푯말이 나온다. 이곳이 백약이오름 입구. 빈터에서 왼쪽으로 난 비포장길을 걸어가면 10분 거리에 동검은이오름 입구가 있다.

글·사진 박운석기자 dolbbi@msnet.co.kr

사진: 백약이오름을 오르다 되돌아보면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초원을 배경으로 탁트인 전망이 반긴다. 앞쪽에 보이는 작은 언덕이 영화 '이재수의 난'을 촬영했던 아부오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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