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정치 과잉 사회'의 역설

한국은 '정치 과잉' 사회다. 그래서 뜨거운 정치 열기를 탓해야 할 것인가? 그렇진 않다. 정치 과잉은 그 누구에게건 합리적 선택이다. 정치가 제공할 수 있는 게 워낙 많고 크기 때문이다. 재벌 총수도 정치 앞에선 벌벌 떨 수 있고, 농민들도 정치 앞에서 피를 토하고 싶어 한다. 아무 할 일 없이 놀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도 줄만 잘 서면 만인을 호령할 수 있는 공직의 우두머리로 변신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도 정치의 힘이다. 그냥 가면 될 일도 안 되고, 누군가의 전화 한 통화면 안 될 일도 되더라는 '게임의 법칙'을 터득한 사람들은 정치에 침을 뱉으면서도 정치 과잉의 삶을 살아야 할 이유를 절감하게 된다.

정치 과잉이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본 독재'를 막거나 넘어서게 해줄 수 있는 동력으로 기능할 수 있다. 또 연예계나 스포츠계에 존재하는 오빠부대 문화를 정치에 도입하게 해 선동정치와 포퓰리즘의 위험을 수반하면서도 정치혐오주의를 넘어서 참여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그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정치 과잉은 정치 개혁을 어렵게 만든다. 특히 정치 개혁을 해보자는 뜻으로 불러일으킨 정치 과잉이 정치 개혁을 어렵게 만든다면, 이는 기막힌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 역설은 한국의 특수 상황과 인간의 욕망에 대한 탐구와 성찰을 게을리 한 탓에 발생한다.

한국처럼 동질적인 사람들이 좁은 지역에 빽빽하게 모여 사는 나라는 매우 드물다. 이런 나라에선 삶의 의미와 보람이 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에 삶의 주된 동력이 되는 '인정 욕구'는 타인지향적이다. 자기 자신의 내면 세계보다는 남들이 알아주는 맛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정치는 '인정 욕구'를 드라마틱하게 충족시켜 주는 마약이다. 그래서 많은 의원 지망생들이 빚더미 위에 올라 앉으면서도 선거 때만 되면 가망 없는 출마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 '인정 욕구'엔 속물적인 면도 있지만, 순수성과 이타성도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남들이 나를 알아줘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목적을 위해 자신의 속물적인 이익을 저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년 5'31 지방선거까진 아직 6개월 이상 남았는데도 벌써 기초단체장 후보들의 선거법 위반 사례만 700건을 넘어섰다. 이들이 공직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그렇게 발버둥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큰 오해다. 그런 사람이 없진 않겠지만, 대부분은 '인정 욕구'를 위해 그 험한 선거판에 뛰어들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인정 욕구'는 돈이나 권력에 대한 탐욕보다 더욱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돈이나 권력은 잘 살기 위한 수단일 수 있지만, '인정 욕구'는 그 자체로서 삶의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정치 개혁을 해보겠다는 좋은 뜻을 갖고 있을수록 '인정 욕구'는 더욱 강해진다.

'인정 욕구'가 지배하는 정치 과잉 사회에서 선거는 이미 선거가 아니다. 민주주의 교과서에서 말하는 의미의 선거는 아닌 것이다. 그건 '밥그릇'보다 더 무서운 '삶의 의미'를 놓고 벌이는 처절한 전쟁이다. 사생결단(死生決斷)의 혈투다. 정치 개혁은 그 투쟁의 와중에서 증발하게 돼 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의미에선 인간의 모든 행위가 정치이겠지만, 우리가 보통 말하는 의미에서의 정치가 그 목소리를 낯춰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화된 해결방식은 사람들의 '인정욕구'에 불을 지르기 때문에 갈등을 심화시키고 분열의 골만 깊게 만들 수 있다.

한국인은 명분에 죽고 사는 명분의 민족이다. 이건 한국정치의 큰 자산이요 자랑이지만, 정치에서 '인정욕구'의 문제를 외면하게 함으로써 늘 정치로부터 '뒤통수 맞는' 시행착오를 반복하게 하는 주요 이유가 되고 있다.

재미있고도 놀라운 건 많은 정치행위자들이 '인정욕구'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건 그건 우국충정(憂國衷情)과 이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각 불능 또는 나르시시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것부터 극복하는 것이 정치 개혁의 올바른 출발점이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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