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은 "조작극"

박정희 정권 당시 발생한 인민혁명당(인혁당) 및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책임 아래 수사됐지만 권력자의 자의적 요구에 따라 수사방향이 미리 결정, 집행된 사건이라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또 이들 사건은 학생시위로 인한 정권의 위기상황 속에서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과 중정부장에 의해 사건의 실체가 매우 과장된 채 발표됐다는 판단도 나왔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7일 국정원에서 이 같은 내용의 1, 2차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진실위는 이에 따라 "피해자들의 피해회복을 위해 국가 차원의 적절한 조치가신속하게 이뤄져야 할 것"이라며 "이젠 국보법을 이용해 헌법적 권리를 중대하게 침해한 과거 권위주의 시절과 결별하려는 국가 차원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진실위는 "대통령이나 중정부장의 발표에서 규정된 인혁당이나 민청학련의 성격은 그대로 수사지침이 돼 짜맞추기가 진행돼 이들 단체를 무리하게 반국가단체로 만들어간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불리한 진술의 강요나 핵심인물을 찾기 위한 고문이나 가혹행위가 자행됐다"고 밝혔다.

진실위는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의 경우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이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주장, 사표를 냈지만 중정부장 출신의 신직수 검찰총장 등이 기소를 강행, 검찰의 독립성이 중정과 정권에 의해 훼손된 것으로 봤다.

또 민청학련 사건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직접 나서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을 받는 인민혁명 시도로 왜곡, 1천여명을 영장없이 잡아 2 53명을 군법정에 세워 7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최대의 학생운동 탄압사건으로 진실위는 규정했다.

진실위는 인혁당 재건위와 관련된 민청학련사건의 경우 긴급조치에 따라 다수의시민학생이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하고 군법회의에 회부해 인권을 침해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인혁당 재건위를 북한방송 녹취물을 돌려본 것은 실정법 위반이었지만그 처벌은 최고 징역 1∼2년 정도에 그치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8명을 사형에처한 것은 국가형벌권 남용이라고 진실위는 설명했다.

또 독재정권 유지를 위한 공포분위기 조성을 위한 필요성 때문에 과도한 법 집행이 이뤄진 것으로 판단했다.

조사결과, 1차 인혁당사건은 중정 발표와는 달리 강령과 규약이 일부 논의되기는 했지만 채택된 적이 없고 당 수준에 이르지 못한 서클 형태였던 만큼 인혁당이국가변란을 기도한 반국가단체로 실재했다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또 1964년 한일회담 반대 학생데모가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조종으로 발생됐다고 볼 수 없고 북한의 지령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판단도 나왔다.

민청학련 역시 중정 발표처럼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조직된 반국가단체가 아니라반유신투쟁을 위한 학생들의 연락망 수준의 조직이 유인물에 표기한 조직명칭에 불과하며, 민청학련의 이름으로 추진된 시위도 사회주의 정부 건설이 아니라 유신정권타도를 통한 민주정부 수립이라고 진실위는 확인했다.

진실위는 '인혁당 재건위'의 이름은 중정과 군사법정 검찰부가 검찰 송치 직전에 편의상 붙인 사건의 명칭일 뿐 실제 존재한 지하조직의 명칭이 아니며, 체제전복이나 국가전복기도행위의 근거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인혁당 재건위의 공판조서가 변조된 정황도 진실위는 확인했다.

특히 재건위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이 대법원 판단이 나온 지 18시간 만에 집행된 것과 관련, 진실위는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사형이 전격 집행됐다는 사실을확인할 문서나 증언은 없었지만 사전에 국방부와 법무부 등의 긴밀한 협조가 있어야만 집행될 수 있다는 점에 비춰 대법원 확정판결 즉시 처형한다는 방침은 이미 청와대 선에서 정해진 것으로 무리없이 판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1차 인혁당 사건은 한일회담과 대일 굴욕외교를 반대하는 시위가 거세던 1964년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혁당을 적발해 관련자41명을 구속했다고 중정이 발표한 것이다. 2차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은 1974년 4월 '긴급조치 4호' 발표 이후 민청학련을 중심으로 유신에 대한 반대가 거세지자 중정이 그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 인혁당 재건위 및 민청학련 관련자를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처벌한 사건을말한다.

이 가운데 사형이 선고된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은 1975년 4월8일 대법원의상고기각 결정이 내려진 지 18시간 만인 4월9일 형이 집행돼 당시 국제법학자협회는이날을 '사법사상 치욕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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