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7일 1964년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과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및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모두 최고 권력자의 자의적 요구에 따라 수사방향이 미리 결정돼 집행된 사건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 사건들은 박정희 정권이 각각 민정 이양 직후와 유신체제 출범 직후 학생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 가운데 발표한 대형 공안 사건들로, 정권의 위기상황속에서제대로 수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중정부장들에 의해 사건의실체가 매우 과장된 채 발표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이 1964년 6.3 사태라 불리는 한일회담 반대데모로 큰 위기에 빠져 계엄령까지 선포된 상황에서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으로 발표된 인혁당 사건은 "반정부 학생시위의 파장을 줄이려는 과정에서 발표된 공안사건"으로 규정됐다.
중정은 그 해 8월14일 '인혁당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은수배 중'이라고 발표했지만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는 고문 의혹을 받고 있는 자백 외에는 혐의를 입증할 만한 별다른 증거를 찾을 수 없어 기소장에 서명하는 것조차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신직수 당시 검찰총장은 사건을 수사하지도 않은 당직 검사를 시켜 2 6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고 공안부 검사들은 이에 반발, 사표까지 제출하는 항명파동이 전개됐고 이후 고문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당초 기소사유였던 '국보법 위반' 혐의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격하됐다.
특히 검찰이 고문의혹이 제기된 중정 수사를 백지화하고 원점에서 다시 수사에착수하면서 '국보법 위반' 혐의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격하된 점 등에 비추어 볼때 중정의 수사과정에서 고문이 자행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게 진실위의 판단이다.
진실위는 이와 함께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발표된 남파간첩 김영춘이나인혁당 창당위원 김배영 등도 중정이 시기나 전후사정 등을 허위로 조작했던 것으로드러났다고 밝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 사건 관련자 전원은 최대 징역 3년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등 유죄판결을 받았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 역시 권력자가 개입했다는 점에서 인혁당 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학생들의 반유신운동에 재야 민주인사들도 가세함에 따라 1974년 1월8일 긴급조치 1,2호가 발동됐고 그해 4월3일 오전 서울대.이화여대.성균관대 등 서울시내 각대학에서 '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이 배포되면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 박정희 당시대통령이 특별담화를 통해 불순세력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한다고 발표한 것이 본격 시발점이 됐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중정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그 해 4월과 5월 잇따라 민청학련과인혁당 사건을 발표했고 7월 유인태, 이 철 등 7명에게 사형, 7명에게 무기징역, 12 명에게 징역 20년, 6명에게 징역 15년형 등 총 32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진실위는 그러나 민청학련은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조직된 반국가단체가 아니라반유신투쟁을 위한 학생들의 연락망 수준의 조직이 유인물에 표기한 조직명칭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진실위는 특히 "수사도 하지않은 상황에서 발표된 대통령의 담화문에서 이미 민청학련이 공산주의자와 결탁하여 인민혁명을 수행하는 조직이라고 규정됐기 때문에중정의 수사방향도 처음부터 민청학련 주요 관련자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설정돼 있었다"고 밝혔다. 결국 대통령이나 중정부장의 발표에서 규정된 인혁당이나 민청학련의 성격이 그대로 수사지침이 됐으며 이 지침에 따라 짜 맞추기가 진행돼 이들 단체가 무리하게반국가단체로 만들어졌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특히 민청학련.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관련, 사형이 선고됐던 8명에게 대법원이1975년 4월8일 상고를 기각한 뒤 18시간만인 다음 날 새벽 4시 형이 전격 집행된 것은 긴급조치와 대통령 특별담화를 비롯한 여러 정황을 감안했을 때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고 진실위는 밝혔다.
진실위 간사인 안병욱 교수는 이날 "어느 경우에도 사형집행은 대통령의 재가사항"이라면서 "군사법정이라 하더라도 군 통수권자는 대통령이며 대통령의 책임하에 이뤄지지 않고는 사형집행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진실위는 인혁당.민청학련 사건 조사를 위해 459건 6만7천223쪽의 국정원 자료, 80건 2만2천165쪽의 문서와 참고인 조사 녹화테이프 25개 등 국가기록원 자료를 포함한 164건 4만5천968쪽의 다른 기관 보유 자료, 그리고 82건 6천490쪽의 일반자료를 참고하는 대작업을 벌여 이날 결과를 발표했다.
진실위는 또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이 선고됐던 유인태 의원과 이 철 한국철도공사 사장을 지난 10월 면담하는 등 사건 관계자 18명, 사건 당시 중정 직원 8명, 당시 관련 국가기관 직원 19명 등을 면담했다.
진실위는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이 국가 권력자의 의도에 따라 저질러진 사건임을 밝혀낸 쾌거를 거뒀지만 여전히 관련자의 '자발적인 협조'와 비교적 불충분한 자료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는 한계를 노출했다.
진실위측 관계자는 이날 "관련자 협조를 받아 조사했으며 30∼40년전 조사를 위해 관련자 증언에 의거할 때 자의적이거나 기억상 착각이 있을 수 있고 오늘날 정치적 입장에 따라 상반된 내용을 말할 수도 있다"고 한계점을 토로했다.
진실위는 7대 우선조사 대상 사건 중 김형욱 전 중정부장 납치사건, 부일장학회강제헌납사건 등 그동안 3건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한 데 이어 가능하면 연말께 1 건의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추가 발표할 예정이다.
연합뉴스
◇ 인혁당.민청학련 사건 주요 일지
▲1963.6.3 '굴욕적 한일회담' 비판 시위 확산되자 비상계엄령 선포 ▲1964. 8.14 중앙정보부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 발표 "관련자 57명 중 41명 구속, 16명 수배" ▲1965.1.20 1심 판결, 피의자 2명만 2, 3년 징역형, 나머지 11명은 무죄 ▲1965.6.29 2심 판결, 6명 징역 1년, 그외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1965.9.21 대법원 항소심 판결 그대로 인정 ▲1972년 10.17 유신 선포 ▲1973. 10.2 서울대에서 국내 최초 유신반대 시위 촉발, 전국대학 확산 ▲1973.12 장준하.백기완 선생 중심, 국민개헌청원운동 진행 ▲1974.4.3 박정희 대통령 특별담화 "민청학련 단체, 불순세력 배후조종으로 인민혁명 수행하려 하고 있다" ▲1974.4 긴급조치 4호 발표, 민청학련 범죄단체로 규정 중앙정보부, 민청학련 배후로 제2차 인혁당(인혁당 재건위) 지목 ▲1975.4.8 대법원 인혁당재건위 판결, 8명 사형.15명 징역 15년∼무기징역 ▲1975.4.9 사형집행 ▲2002.9.12 의문사진상규명위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 조작사건" ▲2002.12.10 인혁당사건 재심청구 ▲2005.12.7 국정원 진실위 사건조사 결과 발표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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