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인 고은씨 "시는 심장의 뉴스"

"시는 심장의 뉴스입니다". 초겨울 바람이 매섭던 7일 오후 대구은행 본점 강당에서 지역 문인· 독자들과 모처럼 자리를 함께 한 고은(72) 시인은 "시는 시집이나 문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이라며 시론(詩論)의 말문을 열었다.

시는 삶의 도처에 존재하며, 시간적으로 처음도 끝도 없고 공간적인 경계와 제한도 없지만, 시는 인간의 근원적인 심성 한 가운데에 자리한다는 것이다.

(사)수성문화원이 개최한 제1회 수성문화아카데미 초청으로 대구에 내려와 '시와 삶'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한 시인은 애주가답게 음료수나 물 대신 안동소주로 목을 축여가며 격의없는 강연을 펼쳤다.

그것도 옛사랑이 생각나는 포항물회집에서 점심 반주로 이미 소주 1병을 비운 뒤라고 했다. 노시인이 던진 술의 메타포는 "요즘 시인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일갈이다. 시가 가슴에서 우러나지 않고 머리에서 짜여져 나오는 세태를 질타한 것이다.

시인은 한국전쟁 직후 피난문단 시절 대구에서의 일화부터 떠올렸다. 구상 시인과 박훈산,서정희 시인 등과의 인연을 회고하며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우연과 필연의 관계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타자(他者)에 의해서 자아(自我)가 규정된다"는 헤겔의 말을 인용하며 '관계'(關係)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했다. "시는 바로 이같은 관계의 아름다움을 꿈꾸는 것입니다. 시대의 본질과 시인의 영혼이 동시에 만나 이루어지는 것이 시입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노시인은 양복 윗도리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최근 우리 사회의 생명 이기주의에 경고 메시지를 던졌다. 생명에는 죽음이라는 대전제가 있는데, 웰빙이다 뭐다해서 지나치게 생명론에만 빠져있다는 것이다.

"삶과 함께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시요, 때로는 종교도 잊어버리는 것이 시입니다". 육두문자도 서슴지 않는 파격적인 강연. 소주 한 모금을 더 들이킨 시인의 담론은 어느덧 언어학으로 옮겨가고 사투리론으로 번져갔다.

"세계화다 일일생활권이다 해서 언어가 없어져 가고 사투리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고유한 생명의 종이 깨어지는 것이요, 영혼의 파멸을 뜻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언어를 영혼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맡은 일에 무한한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다. 분단을 뛰어넘고 통일 기반을 조성하는 겨레말큰사전 만들기에 온몸을 바칠 것이라고 했다.

겨레와 민족 앞에 이 사전 하나 바치고 가는 것이 필생의 대업이라고 했다. 시인은 대구사람들에게 한마디만 덧붙이자고 했다. 만해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김원일의 '푸른혼'을 꼭 읽어보라는 것이다.

'푸른혼'은 대구의 젊은 목숨들을 앗아간 인혁당사건을 그린 소설이다. 그는 어쩔수 없는 통일시인이다. 저항시인이다. 그러나 시인은 정작 자신의 초기시가 말해주듯 탐미적인 예술지상주의 문학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인이 앞서 강조했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가 오늘의 고은 시인을 규정한 것인가. 시는 내면적인 고민을 갖고 천착해야 하지만 이를 끄집어 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시.공간적인 외부 또한 필요할 터이다.

이 땅의 굴곡진 역사와 더불어 한국적 특수성을 보편적 언어로 담아온, 그래서 올해 노벨문학상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됐던 고은 시인. 그는 강연을 마치고 노래까지 한 곡 자청했다. 아리랑을 불렀다. 한국을 대표하는 칠순 노시인의 거침없는 강설과 무애행(無碍行)은 그렇게 대구의 첫 한파를 녹였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사진 정우용기자 v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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