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의 TV를 치우고 나니 주말 저녁마다 안방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채널 돌리는 일로 다투느라 시끌벅적할 때가 자주 생긴다. 나는 더 이상 이 일에 개의치 않고 다른 방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을 수 있게 됐다.
내가 TV를 멀리하게 된 주된 이유는 아마 사극에 환멸 같은 걸 느끼고 나서부터인 것 같다. 삼사년 전 방영된 사극들은 하나같이 서로 헐뜯는 내용들로 가득했다. 아이들의 정서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 같아 못 보게 하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사극에서 역사적 사실은 10%도 안 된다는 강변이 초등학생들에게 먹혀들 리 없었던 것이다.
방송사의 입장에서 보면 시청률 높이기 경쟁에서 타사를 눌러야 하니 시청자들의 흥미를 돋우는 일에 혈안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역사의 어두운 면만 끄집어내어 허구와 과장으로 그럴듯하게 꾸며내어 방영한다면 최고의 시청률 앞에 물들어 가는 어린 마음들은 어떻게 될까.
역사적으로 우리 만큼 이민족들에게 짓밟히고 지배를 받아온 민족들이 흔하지 않다. 그 와중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동족끼리 모함하고 죽이기까지 해야 하는 비극이 생길 수 있었으리라. 물론 내부 다툼으로 국력을 탕진해 외침의 빌미를 제공한 적도 있었지만 주변국의 세력이 너무 강하여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작은 일본이나 큰 중국의 역사에서도 권모술수가 난무하여 저들끼리 서로 헐뜯고 죽이고 한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보면 인간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까지 지나치게 치욕적일 수 있는 면을 부각시켜 유행어를 만들어내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말과 행동을 따라하기까지 하는 것을 보노라면 분명 공영방송으로서 책무에 의아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TV도 안방에서 우리들만 즐길 수 있는 전유물이 아니다. 역사의 치부를 들추어내어 그것도 과장하여 전 세계에 보여주다 보면 자칫 굴절된 한민족의 정서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지 않을까 우려된다. 사극에서도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을 세계만방에 알릴 수 있고,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방영하여 동북공정에 3조원이나 투입한 중국과 자연스럽게 맞서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미국은 양당이 대립을 벌이며 50개의 주가 각자의 권리를 행사하고 있지만 국익에 득이 되는 일이라면 무섭게 단합되는 것을 종종 본다. 민간인 살상이 뻔히 보이는데도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 양당과 대다수 국민들이 지지를 보내지 않았던가. 56개의 이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은 한족에게 서서히 동화되어 가는 심각한 국면에 처해있다고 한다.
인적자원밖에 내세울 것 없는 우리나라에서 줄기세포의 세계적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는 황교수를 키워주기 보다는 싹을 잘라 죽이려는 젊은 PD의 행위도 알고 보면 사극의 그릇된 타성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세계가 경쟁체제로 치닫다 보니 서로 죽이기를 일삼는데 우리끼리는 보듬어가며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민족적 가치관을 세우는 일 아니겠는가. 민족의 자긍심은 우리가 지키며 나아갈 때 그 위상은 반듯한 반석에 올려질 것으로 안다.
초록이 단풍으로 물들어 자신의 소임을 다해 스스로 땅에 떨어져 부식토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계절이다. 부식토가 되는 것은 나무를 위해서나 자연을 위해서나 좋은 일이다.
전문호(시인·능인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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