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권에서만 한 해 500여 명의 박사가 쏟아져 나오는 등 초(超)고학력 사회로 접어들었지만 놀고 있는 박사들이 넘쳐나고 있다.10년 넘게 월 100여만 원의 '푼돈'을 받으며 시간강사로 전전하거나 박사학위를 숨긴 채 직업전문학교에 들어가는 '박사'까지 나오고 있다.교육관계자들은 국가적 차원의 박사인력 활용방안이 있어야 하며 심각한 학력 과잉 현상도 반드시 수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최 박사'의 눈물=10년 전, 최모(38) 씨의 겨울은 따뜻했다. 동기생들보다 3년가량 빨리 박사학위를 취득, '교수직은 문제없다'는 주변의 찬사가 쏟아졌던 것. 그때부터 최 박사의 기다림은 시작됐다. 동기들이 "이젠 취업을 하겠다"며 하나둘씩 떠나가도 그는 학교에 남았다. "조금만 더 참자"며 이 대학, 저 대학 '보따리 장사' 생활이 이어졌다. 1999년 결혼한 최 박사는 '이 생활'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고, 취업 전선에 섰다. 하지만 인문학 박사에게 취업기회는 쉽사리 주어지지 않았다.
최 박사는 지역의 한 직업 전문학교 문을 두드렸다. 학력을 '고졸'이라 속였다. 그의 '긴 가방끈'은 이미 거추장스러운 굴레로 변해 있었다. "시간당 3만~4만 원 정도인 시간강사 수입으로는 가정을 꾸리기가 힘들어요. 1주일에 10시간 정도 강의하면 한 달에 120만 원 남짓 벌지만, 그것도 방학을 제외하면 1년에 여덟 달뿐이니. 공장에 나가 일해도 그 정도는 벌더군요."
지금 최 박사는 한 공장에서 선반가공으로 월 150만 원을 받는다. "아직도 학교 쪽으로 가끔 발길이 갑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절망적입니다." 그는 허탈해 했다.국문학 박사인 김모(30·여) 씨 역시 올 한 해 내내 '백조' 신세였다. 그동안 전국을 떠돌며 1주일에 20시간씩 시간강사로 일했지만 힘이 부쳐 포기했다는 것.
"부산, 울산, 전주, 충주까지 하루 3시간씩 강의하러 뛰어 다녔어요. 처음엔 그래도 희망을 가졌지만 세월이 절망만 안기더군요. 내가 그동안 왜 힘들게 공부했나, 자괴감만 들었어요. 지금은 포기했어요. 집에서 시집이나 가라고 해서 지금은 선보러 다녀요." 그녀는 '박사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다.
△박사는 얼마나?=올 2월 지역 대학에서 배출한 박사 학위자는 571명. 지난해 2월엔 571명, 2003년 2월엔 564명의 박사 학위자가 배출되는 등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전임교수 자리는 한정된 마당에 '실업자 박사'가 자꾸 양성되는 이유는 뭘까. 경북대 한 관계자는 "장기 경기 불황으로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쉽잖아 도피성 대학원 진학이 늘고 있는 탓도 크다"고 분석했다.
△이대로 좋은가?=전문가들은 "박사인력의 취업난 등 학력과잉은 국가 경쟁력을 크게 훼손할 것"이라고 우려한다.경북대 국문학과 이상규 교수는 "국내에서는 설자리가 없어 해외로 나가는 박사들이 많아지는 등 고급 인재의 해외 유출현상이 심각하다"며 "박사 인력의 효과적 활용방안과 향후 박사 인력의 수요와 공급 균형화를 위한 방안이 국가적 차원에서 모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향후 박사들의 연구활동을 지원하는 학술진흥재단의 포스트닥(박사 후 과정) 지원 제도를 늘리고 국책연구소와 민간연구소 자체의 포스트닥 과정을 증설, 박사들의 연구 활동을 지원해 나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역 한 제조업체 대표(47)는 "박사들이 일반 기업체에 취업해도 만족도가 낮아 잘 정착 못하고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며 "차라리 학사과정을 마친 뒤 기업체에서 경험을 쌓고 이후에 뜻이 있다면 공부를 더 하는 것이 개인과 사회 전체적으로 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욱진기자 pencho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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