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추처럼 출퇴근하던 남편이 잠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른다. 신호 대기 중, 바뀐 신호에 가속기를 밟지만 차는 꼼짝 않는다. 퇴근 시 미소 띤 아내가 없다. 캄캄한 밤이 되어도 귀가하지 않는다. 원터치로 좌르륵 하던 수도꼭지를 두들겨도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 술이 밥이라던 친구가 문득 술자리를 피한다.
남편을, 자동차를, 아내를, 수도꼭지를, 술친구를 다시 본다. 묵묵히 출근하는 남편의 등을 아름답게 여겼던가, 열심히 발이 되어준 애마의 피곤과 상처를 살폈던가, 가사에 함몰된 아내의 침묵과 우울을 이해하려 했었던가, 한 방울 물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던가, 술친구의 건강을 염려했던가?
인간은 참으로 미련하다. 거부하지 않으면 존재의 가치를 모른다. 끼니 때, 설거지 그릇 수북이 쌓인 개수대와 텅 빈 식탁을 보아야 어머니의 무제한 헌신과 그녀의 존재를 새삼 깨닫는다. 가슴까지 쌓인 눈밭에서야 길의 소중함을 안다. 위장에 구멍이 나야 첫 술잔의 감미로움을 그리워한다.
'거부로서의 존재', 이는 일찍이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로 인식한 독일 실존주의 철학의 거장 하이데거의 유사한 사유가 낳은 명언이다. 그 비유가 '부서진 망치'이다. 망치는 항상 튼튼하니까, 아무리 두드려도 망가지지 않는다고 여긴다. 망치가 부서져 못을 박을 수 없을 때에야 망치의 존재를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망치의 부서짐은 우연이 아니라, 어쩌면 예비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미련하기도 하지만 때론 미련한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현명함도 지니고 있다. 거부의 몸짓을 보고서야 존재를 인식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 완전한 거부는 죽음이 아니겠는가. 비록 인간이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다 할지라도….
또 한 해가 저문다. 이 순간 하이데거의 명언에 나의 작은 생각을 기댄다. 혹 예비된 거부의 몸짓은 없는가? 애정을 갖고 자신과 주위를 살피자. 애정의 대상이 어찌 사람뿐이랴. 묵묵한 수용의 몸짓으로도 존재의 귀함을 알자. 부서지기 전에 망치를 다독여 거부의 몸짓을 유예하자. 그리고 글피엔 다시 뜨는 해를 새롭게 끌어안자.
정화식 대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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