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의 지난 역사는 적어도 동토(凍土)의 송백(松柏)을 지향했음을 자부한다. 혹한(酷寒)의 시대에는 여물게, 혹서(酷暑)의 계절에는 성글게 나이테를 그리며 정론(正論)과 직필(直筆)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매일신문은 1946년 3월 1일 남선경제신문(南鮮經濟新聞)이란 이름으로 창간호를 발행했다. 1950년 8월 대구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꾸면서 종합일간지의 면모를 갖췄고, 지역의 대변지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천주교 대구교구유지재단에서 신문사의 운영권을 인수했고, 1955년 9월 14일 자유당 정권의 잦은 학생동원을 비판한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로 사옥이 피습되는 수난을 겪었다.
사세 신장과 함께 1958년 12월 태평로 사옥을 남일동으로 옮기면서 전국지로 성장해 제호를 매일신문으로 바꾸었다. 1964년 8월 지방지로는 유일하게 언론윤리 악법 저지에 앞장섰다.1965년에는 영덕 필화사건으로 편집국 간부가 구속되었으나 무죄판결을 받았다.
1980년 11월 정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당시 영남일보 인원과 시설을 흡수·통합했으며, 사옥을 현재의 계산동으로 옮겼다. 1983년 전국 일간지 중 처음으로 '매일생활정보'라는 무료 자매지를 창간했고, 1987년에 3개 지사(현재의 지역본부)를 설치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와함께 대구 최고 도심지인 반월당 네거리에 뉴스 속보용 옥외전광판을 설치했다.
1990년에는 강원,광주,대전,부산,대구의 5개 지방신문사가 춘추회(春秋會)를 결성해 세계 5개 지역에 특파원을 공동으로 파견해 기사를 교류했다. 1991년 6월 전지면을 전산 제작하면서 오랜 납활자시대를 마감했고, 1993년 9월 대구 인근 성서에 인쇄공장을 건립했다.
1994년 5월 종합광고대행사 '매일애드포커스'를 인수했으며, 그 해에 중부지역본부(구미)와 동부지역본부(포항) 사옥을 세웠다. 그러나 날로 신장되던 사세는 IMF 외환위기와 함께 초유의 시련을 맞았다.
1997년 4월 한글 제호 변경과 함께 전면 가로쓰기에 들어갔으며, 2002년 4월에는 독자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등 재도약의 닻을 올렸다. 교육섹션(희망교육) 별지발행과 기획탐사팀 운영에 이어 2005년 7월 페이지네이션을 단행하고 주5일 근무제에 부응한 주말판 제작을 시작했다.
매일신문이 독재정권 시절 '야당지'(野黨紙)로, '할 말을 하는 신문'으로 전국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지금도 '정론지'(正論紙)로 대구·경북의 선도지(先導紙)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이같이 오랜 역사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신문은 종합일간지로는 드물게 가톨릭 재단 소속이다. 소유형태의 공공성으로 인해 개인이 사주로 있는 신문사와는 달리 사적인 이익이나 편집권의 외압 등으로 부터 자유로운 신문이다.
매일신문은 한국 언론사의 대표 논객인 몽향 최석채 선생을 배출하는 등 우리 언론역사의 한 축을 이끌어 왔다. 대구·경북지역 최고의 신문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거듭나기 위한 매일신문의 노력에 독자 여러분들의 변함없는 사랑을 당부한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사진 : (위로부터) "학도를 도구로…" 라는 사설로 인해 구속된 최석채 주필의 1심 공판(1955.11.8). 대구시 중구 남일동 사옥(현재 국민은행 대구지점 자리). 전국 최초로 창간한 무료 주간신문 '매일 생홟정보' 창간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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