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이라는 세월과 그 속에 감춰진 삶의 흔적은 결코 가볍거나 얕지 않다. 근대의 여명기,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후 대구·경북의 역사가 된 주인공들의 지나온 흔적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한 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세기를 여는 시점에서 지나온 긴 시간의 흐름을 되짚어보는 것도 의미가 남다르다. 격동의 우리 근·현대사, 그 온갖 질곡과 혼돈속에서도 굳굳이 100 성상(星霜)을 쌓은 대구·경북지역의 기관단체,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 등을 시리즈로 알아본다.
대구상공회의소 (상)
대구상공회의소는 올해로 창립 100주년을 맞는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기관이다. 그래서 대구상의 역사에는 대구를 비롯해 한국경제 성장기의 빛과 IMF의 그림자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구는 60, 70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섬유산업으로 한국 수출에 한몫을 담당한 곳이었다. 일제시대 1천200만 원의 국채를 갚아 자존을 이루자며 단연(斷煙)운동을 펼쳤던 전통상인 서상돈 선생과 대구은행 초대행장과 제일은행장, 한국은행 총재를 거쳐 부총리에 발탁된 김준성씨, 직물 하나로 한 해 5억 달러 수출을 기록한 동국무역 백욱기 회장 등 우리 나라 경제사에 한 획을 그은 대구가 낳은 기업인은 숱하다. 게다가 삼성, 대성그룹, 무림제지, 코오롱, 이수화학 등 한국 굴지의 대기업들도 대구에서 탄생, 전국으로 뻗어나갔다. 국채보상운동으로 출발한 이래 100년간 대구경제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대구상의 역사를 1906년~1961년, 1962년~2005년 등 두차례로 나눠 살펴본다.
▨태동기(1906~1945년)
개항 후 부산으로 몰려들었던 일본상인들이 처음으로 대구에 진출한 것은 1893년 9월이었다. 부산에 와서 상업을 하던 히자쯔끼(膝付), 모로(室) 등 두 명의 일본상인이 남문 내에 한옥을 빌려 의약품과 잡화상을 경영한 것이 최초이다.
1904년 대구에 경부철도 공사장이 설치되면서 1천500여 명의 일본인 이주를 계기로 대구에도 일본 상인들의 진출이 본격화됐다. 당시 우리나라 3대 시장의 하나였던 서문시장과 전국 제1의 약령시(藥令市)는 급속히 일본인들에 의해 잠식돼 갔다.
이에 맞서 1906년 서상돈, 김광제, 정재학, 서병오 등 지역상인들이 중심이 돼 민족상권과 자본을 지키기 위해 '대구민의소'를 설립, 오늘의 대구상공회의소의 모태가 됐다.
1907년 2월 대구민의소는 역사적인 대사업인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다. 대구민의소 간부들은 한 사람이 한달 담뱃값을 20전으로 잡고 2천만 동포가 석 달만 담배를 끊는다면 1천200만 원을 모아 일본에 진 빚을 갚을 수 있다며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운동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당시 민족상권 지키기가 얼마나 절실했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였다.
대구민의소가 1922년 추진한 최대의 사업은 서문시장을 현재 대신동으로 이전한 것이다. 서문시장 주변의 땅은 4천400여 평에 이르러 이후 대구상업계의 중심이 되었다.
대구민의소는 이후 대구조선인상업회의소·대구상업회의소, 대구상공회의소 등으로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다 1944년 경북상공경제회로 개편돼 이듬해 해방을 맞았다.
▨혼란을 넘어 안정으로(1946~1961년)
일제의 패망으로 기능이 마비된 경북상공경제회는 1946년 경북상공회의소로 출범, 7년간 존속했다.
이어 1952년 상공회의소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임의단체인 상의가 공법인 단체가 됐으며, 1953년 관할 구역을 경북 전지역에서 대구시로 국한시키고 이름도 대구상공회의소로 변경됐다. 1954년 의원선거에서 여상원씨가 대구상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돼 새시대를 열게 됐다.
대구상의는 또 1959년 10월 대구 중구 동문동에 신청사를 마련함으로써 상공업계의 심장부로서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공법인으로 재발족한 대구상의는 이 시기 대구지역 경제발전에 많은 공헌을 남겼다. 중소기업육성을 위한 재건자금의 알선, 전력난 해소를 위한 제반대책, 대규모 섬유공장의 유치, 거래질서 확립을 위한 행사, 공과대학 설립 추진 등 인재양성대책, 시장의 근대화 추진 등 상공업계의 발전을 위한 종합적인 사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업계에 봉사하는 상의가 아니라 일종의 권력형 기관을 군림했다는 비판도 함께 받았다. 때문에 업계의 자발적인 협조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며, 예산도 제대로 확보할 수 없어 업계를 위한 사업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여러 가지 문제점은 많았지만 대구상의는 1950년대 유일한 경제종합단체로서 간담회, 토론회 등을 많이 주최하고 각 산업간 또는 민·관간의 대화의 광장을 마련했으며, 각 산업별 협회·조합 등의 결성을 알선 또는 조성한 것은 평가받을 만하다.
모현철기자 mom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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