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누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 들녘 끝으로

아주 조그맣게 사라져 갑니다.

이 겨울 저녁엔

먼 옛날처럼 진눈깨비가 내리고,

저희도 저 눈발 속에 저물어

한 세월을 보냅니다.

누군가 이 세상의 사랑도 다 잊고

저 들녘 끝으로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정우(1946~ ) '겨울 저녁-세모 송년시'

사라짐이 곧 없음(無)으로 이어질 때 '사라짐'은 우리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이 '사라짐' 앞에 한없이 비루해지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의 '사라짐'은 또 다른 그 무엇의 '창조'를 위한 통과의례이기도 합니다. '사라짐'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이렇게 전환하는 순간, '누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 들녘 끝으로/ 아주 조그맣게 사라져'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산다'는 것을 편하게 말하면 '저 눈발 속에 저물어/ 한 세월'을 보내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흘 전, 한 해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새해를 맞았습니다. 저문 을유년(乙酉年)이 있었기에 새해 병술년(丙戌年)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사라짐 앞에 비루해질 것이 아니라 새 시대를 여는 '사라짐'을 위해 올 한 해를 보다 깊이 있는 삶으로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구석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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