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10월 하순. 성벽 근처에 살던 대구성내 사람들은 성벽이 무너지는 요란한 소리에 놀라 새벽잠에서 깼다. 집 밖을 뛰쳐나온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인들의 지휘감독 아래 60여 명의 조선인 인부들이 10여 조로 나눠져 사방에서 일제히 성벽을 부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 12(1736)년 6월에 축성된 대구성은 높이 18척(약 5.4m) 총길이 2,124보(약2,200m)의 석성이었다. 그동안 관리부실로 군데군데 허물어진 곳도 있었으나 '대구사람'이란 호칭 대신 '성내사람'이라 불리길 더 좋아할 정도로 대구성은 은근한 자부심의 원천으로 대구토박이들의 사랑을 받아 왔었다.
주로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축조된 평지의 성곽이었던 만큼, 임금의 윤허 없는 인위적인 파손행위는 안보 차원의 중벌로 다스려져 온 것이 전통이었다. 따라서 사전 예고도 없는 가운데, 다름 아닌 '굴러온 돌'격인 일인들에 의해, 새벽에 벌어진 기습철거행위는 조선왕조의 사직 한 귀퉁이를 무너뜨리는 상징처럼 비쳐져 성내사람들의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뒷날 무용담 삼아 늘어놓은 일인들의 '회고기' 등을 통해 대구성벽철거사건의 속내가 들어난다. 당시 대구군수이자 경상북도관찰사서리였던 박중양(朴重陽)과 대구의 일인들이 한통속이 되어 몇 년간 은밀하게 추진해 오던 땅 투기 작전의 '완결편'으로 감행된 것이 이 사건의 숨은 진상이었다.
이 무렵 대구성내의 땅값은 당시 일화(日貨)로 평당 23원꼴이었다. 반면 성 밖은 불과 6원, 좀 비싸야 10원 꼴이었다. 수입성냥 한 갑이 4원10전, 삿포로 맥주 한 병이 12원50전 하던 시절이다. 따라서 성벽을 허물고 도로를 내면 땅값이 폭등하리란 사실을 이재(理財)에 잽싼 일인들이 모를 리 없었다. 때문에 이들은 값싼 성 밖의 임야며 전답에 눈독을 들여 매물이 나오는 대로 싹쓸이를 해오고 있었다.
그 다음의 일은 하루 빨리 성벽을 허무는 공작이었다. 도로개설의 장애물인 성벽부터 걷어내어야 대구가 클 수 있다는 명분론을 앞세워 관리들을 부추겼다. 그러나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절차상 관찰사가 올린 상소에 임금의 허락이 떨어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평균재임기간이 반년에 불과했던 구한말의 경북관찰사들은 이 말썽스러운 중대사안에 누구도 선뜻 총대를 메려하지 않았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박중양이었다.
적극적인 조기철거론자였던 그는 이때 마침 관찰사서리직을 잠시 겸하게 된 틈을 이용해 일인들의 모의에 동조했다. 부산에서 은밀히 인부들을 불러들여 벼락치기로 성벽을 허물고 나면 최고 관리책임자 자격인 박중양이 온갖 행정적 뒷감당을 한다는 다짐 아래 자행된 기습철거였던 것이다.
성이 헐리고 길이 나자 성 밖의 땅값은 평당 60원, 성안은 230원으로, 불과 반년 만에 열 배나 폭등했다고 일인들은 흥겹게 회고했다. 일제하 오꾸라 다께노스케(小倉武之助) 남선전기 사장과 같은 일인재력가가 유독 대구에 많았던 것도 이때에 한몫 보아 종자돈이 푸짐했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헐값에 전답을 날린 조선인들이 땅을 치며 통음(痛飮)하는 한 편에선 거부가 된 일인들의 건배소리가 날로 높았다. 고종을 깔보고 '선 철거 후 보고'를 했던 친일원조 박중양은 그 뒤 투옥될 뻔했으나 이등박문에 매달려 오히려 승승장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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