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지도를 펼치면 산둥반도는 대륙의 동북쪽 한 끝을 품은 변방이다. 그러나 전국시대 노(魯)와 제(齊)나라의 수도였던 곡부(曲阜)와 제남(濟南·현재 산둥성 성도)이 있어 길고 화려한 역사와 문화가 오롯이 숨을 쉬고 있는 땅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1987년 유네스코 세계자연문화유적지가 된 태산(泰山)이 있다. '하늘 아래 첫 산' 또는 '오악지존(五嶽至尊)'으로 불리는 태산은 중국 역사·문화의 축소판.
진 시황과 한 무제를 비롯, 측천무후, 당 현종 등 역대 중국 황제들이 국가 안녕과 복을 비는 봉선제례를 행했고 공자가 몸소 걸어 꼭대기까지 오른 곳이 태산이요, 당대의 유명시인들이 태산의 장엄함에 취해 바위마다 시(詩)와 부(賦)를 새긴 곳 또한 태산이다.
어디 이뿐이랴. 유(儒), 불(佛), 선(仙), 도(道)가의 사찰과 제단, 관문, 일주문 등 각 건축물이 저마다 묘(廟), 궁(宮), 문(門), 교(橋), 각(閣), 가(佳)의 현판을 달고 정상까지 도열해 있다. 이런 까닭에 산행으로 알았던 이방인에게 태산등정은 어느새 역사여행이 되고 만다.
태산의 정상인 해발 1천545m 옥황정(玉皇頂)까지 오르는 길은 모두 네 갈래. 이 중 홍문(紅門), 남천문, 천가(天佳)를 잇는 등정로가 가장 아름답고 볼거리도 많다. 옛 황제들이 올랐던 길이어서 그런지 정상까지 6천566개의 돌계단이 정연하게 놓여 있다. 첫 관문인 홍문을 지나 입장권을 구입하는 만선루(萬仙樓)에서 첫 계단이 시작된다.
지난 12월. 태산엔 눈발이 흩날렸다. 초입부터 눈과 안개가 깔려 겨울 태산은 웅장한 자태를 감추고 있었다.차가운 눈발과 물안개를 뚫고 무리에 섞여 한 걸음 한 걸음 옮겨본다. 태산 자락의 경사는 아직 완만하다. 부지런히 걷다보니 길 좌우의 희미했던 건물들이 하나둘 윤곽을 드러낸다. 조금 크다싶은 전각 앞엔 어김없이 석조 일주문이 먼저 반긴다.
20여 분 걸었을까. 태산 여신을 모신 두모궁(斗母宮)과 도가 사찰인 삼관묘(三官廟)가 나타난다. 안을 살짝 들여다보자 젊은 관리인이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말을 건넨다. 이국땅에서 들리는 모국어가 참 살갑다. 한기도 한결 견딜 만하다.
하지만 잿빛 날씨만큼은 천변만화. 초입에서 멀어질수록 운무가 뒤섞여 어떤 땐 시야를 열었다 금세 한치 앞을 보기도 힘들다.3시간 등정시간 중 1시간 정도 오르니 호천각(壺天閣)이 저 앞에 버티고 서 있다. '해가 푸른 노을을 비추니 천지가 금빛이요(日照碧霞金世界), 달이 태산자락에 걸리니 하늘과 땅에 옥빛 가득하다(月臨泰岱玉乾坤)'는 호천각의 주련문장이 하늘길 가는 입구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부터 태산은 인간세상이 아닌 천상세계가 된다. 하지만 계단 길은 오히려 숨이 턱에 찰 만큼 계단이 가파르게 뻗쳐 있다. 호천각을 돌자마자 나오는 회마령(廻馬嶺)이란 이정표가 말해 주듯 황제도 타고 온 말을 돌려보내고 오직 두 다리의 힘만으로 올라야 했다.
한 모금 냉수로 목을 축인 후 보천교(步天橋)를 걷고 중천문(中天門)을 지나 재신묘(財神廟)에 복을 빈 다음 18구비 계단길을 오른다. 문득 정신을 차려 옆 바위를 보니 '더 이상 땅의 세계는 없고 오직 하늘로부터 만물이 피어난다'는 남천문(南天門)에 다다른다.
글쓴이가 당대의 영산(靈山)을 찾은 뒤 느낀 감회인지, 태평성대를 빌던 선각자의 기원인지는 몰라도 조금은 중화사상에 도취된 듯한 글귀다.머리 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즈음, 중국 고등학생 세 명이 이방인을 알아보고 말을 건다.
"직업이 뭐냐", "북한엔 정말 핵무기가 있느냐", "월급은 많이 받느냐"….
짧은 접촉이었지만 그새 많은 계단을 올라온 모양이다. 늘 그렇듯 산행을 하다보면 고비 길인 7, 8부 능선까지 오르면 정상은 탄력을 받아 그냥 올려진다.이윽고 몸 속 열기 탓에 증발되던 땀이 머릿결에 모여 결빙을 지을 때쯤 옥황정 밑 청제궁(靑帝宮)에 들어선다. 3시간 30분이 흘렀다.
'태산에 오르니 천지간 장관이 눈앞에 펼쳐진다(登高壯現天地間)' 웅혼한 붉은 필치가 정상임을 알린다. 한 줄기 찬 바람이 휑하니 지나면 운무를 걷어가 산을 오른 것이 아니라 크고 높다란 자연 건축물을 올라온 착각이 든다.
그렇다. 태산은 이름만 산이지 중국 역사와 문화를 압축한 또 다른 건축물 이외 다름 아니었다. 다만 심술궂은 날씨가 여전히 눈과 안개로 정상을 꼭 에워싸고 있어 천하절경이라는 태산 밑 장관을 끝내 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협찬=KJ산악회(대구지역 전문안내산악회)
글·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태산은 중국 산둥성 옌타이(烟台)시에서 서쪽으로 약 600km 떨어진 타이안(泰安)시 인근에 있는 명산으로 곤륜산(昆崙山·923m)과 함께 산둥성 최고봉이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