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투표율 70.8%, 찬성률 89.5%. 19년 전 거칠고 황량했던 시절을 기억해 본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의 작은 기적임에 틀림없다.
방폐장 부지선정 사업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1989년 3월 어느 날. 당시 방폐물 사업을 수행하던 한국원자력연구소에 비상이 걸렸다. 방폐장 부지조사가 진행되고 있던 경북 영덕에서 주민들의 반대시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구소는 지질조사를 벌이던 연구원들에게 일단 활동을 중단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공식적인 홍보조직조차 없었던 연구소는 우선 임시로 각 연구실에서 몇몇 연구원들을 차출해 '홍보대책반'을 만들어 주민설득에 나섰다. 그러나 경험이 전무한 아마추어 홍보요원 몇 명이 나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몇 개월에 걸친 주민 설득작업은 전혀 성과가 없었다. 결국 연구소는 부지조사 요원들을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방폐장 사업의 길고 험난한 앞날을 예고하는 하나의 신호탄이었다.
지역주민의 이해와 동의.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홍보의 개념이 거의 전무했던 연구소에서 볼 때는 더욱 그러했다. 연구소는 좀 더 쉽고 빠른 길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찾은 길이 충남 안면도에 원자력 제2연구소를 건설하는 방안이었다. 사용후연료 중간저장시설은 연구시설의 일부로 내륙에 우선 건설하고 중'저준위 방폐장은 추후 대륙붕이나 섬에 건설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연구소가 택한 길은 생각처럼 곧게 뻗은 신작로가 아니었다. 1990년 11월 초 연구소의 계획이 언론을 통해 외부에 알려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등교거부, 상가 철시, 경찰 감금과 폭행 등 치안 부재상태로까지 상황이 악화되자 정부는 계획포기 선언을 해야 했다.
안면도 사태로 방폐장 사업에 대한 국민의 인식은 더욱 나빠졌다. 어쨌든 정부는 사업추진에 있어 기술적 측면 외에 사회적 측면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정부는 서울대에 부지확보 방안에 대한 용역 의뢰와 전국을 대상으로 한 부지공모 등 갖가지 묘책을 동원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상황은 더욱 꼬여만 갔다. 엄청난 후유증만 양산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러한 악순환은 안면도에 이어 영일군 청하면, 양산군 장안읍, 울진군 기성면, 인천시 굴업도까지 계속 이어져 나갔다.
힘든 하루하루가 더해져 7년이라는 세월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동안 연구실 대신 어깨띠를 두르고 길거리며, 국립공원이며, 해수욕장이며, 버스터미널에 나가 홍보물을 뿌리던 연구원들도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더욱 큰 문제는 도저히 앞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결국 1996년 6월에 정부는 방폐장 사업을 한전으로 이관하는 정책 결정을 단행했다. 방폐장 사업의 큰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사업이 한전으로 이관된 후(이후 한수원으로 이관됨)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부지선정의 큰 흐름이 지자체를 대상으로 한 유치공모 방식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방폐물에 대한 국민의 인식도 많이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사업도 다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2003년 7월 14일. 유치공모 마감일을 하루 앞둔 이 날. 전북 부안군이 전격적으로 유치신청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현장답사와 수차례의 회의를 거쳐 7월 24일 정부는 드디어 부안 위도를 방폐장 부지로 공식 발표했다. 상황은 그렇게 끝이 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환경단체와 사회단체, 종교단체를 필두로 한 반대운동은 주민들과 학생들의 가세로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나갔다. 또다시 치안부재 상태로까지 사태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6개월 이상이 또 흘러갔다.
옛말에 '인연은 따로 있는 법'이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우여곡절 끝에 2005년 11월 2일 사상 처음으로 국책사업 유치에 대한 찬반 주민투표가 이루어졌고 결국 천년의 고도 경주가 투표율 70.8%에 찬성률 89.5%로 다른 경쟁지역을 따돌리고 방폐장 부지로 선정된 것이다. 그것은 인연으로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작은 기적이었다. 경주가 방폐장을 택했듯이 방폐장 역시 경주를 택하기 위해 19년이라는 그 굴곡진 세월을 보냈다.
김형준 한국수력원자력㈜ 원자력환경기술원 선임연구원
▨약력 ▷인하대 산업공학과 졸, 동 대학원 산업공학과 석'박사 ▷대전중경공업대, 한밭대 강사 ▷현 한국수력원자력㈜ 원자력환경기술원 기술정책팀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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