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시내 오거리를 지나 경산역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다 보니 오른쪽에 추억을 자극하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붉은 벽돌 옷을 입은 이 일본식 건물은 자신의 머리보다 두 배나 커보이는 간판을 두 개나 내걸고 있었다.
경산시 중방동 경산극장. 지난 50여 년간 극장가를 주름 잡던 단관과 재개봉관들이 최근 5, 6년 새 몸집 불리기에 나선 멀티플렉스에게 모든 자리를 내준 지역에서 유독 옛것을 고수하는 영화관이다. 1942년 지어졌으니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
꼭 10년 전 이 극장을 인수한 이주호(46) 씨는 남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 '외로운 길'을 걷고 있다. 자고 나면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치장을 한 대규모 영화관들이 쑥쑥 크고 있지만 유독 그의 '키 작은 극장'에 대한 애착심은 남다르다.
그는 요즘 직접 극장 간판을 그린다. 1990년 초부터 모든 극장이 영화 간판 대신 컴퓨터 실사출력으로 갈아 타고 있는 상황에서 이씨의 행동은 점점 스러져가는 옛 풍경을 잡으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디지털 시대에 간판 하나 그리는데 하루는 족히 걸린다는 아날로그를 유독 고집하는 이유가 뭘까. "요즘 것은 생명이 없어요. 그림에는 영화배우들이 살아 움직이죠. 극장 간판에도 개성이 있어야지요."
이씨는 요즘 배우들을 그리는 것이 더욱 힘들어졌다고 하소연한다. 박노식, 허장강, 이예춘 씨 같은 옛날 배우들은 선이 굵고 개성이 뚜렷해 그리기가 편한데 요즘 배우들은 그것이 약하다는 것. "그 얼굴이 그 얼굴이어서 그려보면 다 똑같아요. 또 비슷한 이미지의 미남, 미녀가 얼마나 많은지 조금만 잘못 그려도 욕먹기 십상이지요."
어릴 적부터 극장에서 영화간판을 그리던 작은아버지 이규현(60·옛 대구극장 미술부장) 씨의 영향을 받아 하루종일 극장에서 살다시피했던 이 씨. 그 경험이 결국 이 길로 자신을 떠민 '동력'이 돼버렸다.
"하루 한 명의 손님도 잘 찾지 않는 극장을 언제까지 부여잡고 있을지가 가장 큰 걱정"이라는 이씨. 그의 소원은 절세의 영웅과 미녀가 살았던 이 '꿈의 공간'이 다시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정욱진기자 penchok@msnet.co.kr
사진 : 점점 사라져가는 옛날 극장과 손으로 직접 그리는 극장 간판을 60여 년 동안 간직하고 있는 경산시 중방동 경산극장. 극장주 이주호 씨는 멀티플렉스의 대형공세를 꿋꿋하게 지켜내고 있다.
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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