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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남자도 괴롭다"…그들의 솔직토크

설이 코앞이다. 장보고 차례 음식 등을 준비하며 아내들의 명절 스트레스가 더해지는 이즈음, "남편들도 명절이 괴롭다"고 하소연하는 소리가 적잖게 들린다. 지난 17일 매일신문사에서 3명의 남편들이 자리를 같이 했다. 문화센터 강의, 답사여행 등 여성들을 상대로 일을 많이 해 여느 주부들의 심정도 잘 이해하는 세 남자들이 터놓는 남편들의 속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승호=퇴계 이황 선생의 후손으로 명절에 안동에 가면 70~80명씩 일가친척이 모이고 손님이 들락거려 아내는 잠자는 시간 빼고는 부엌에서 일하느라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동서끼리 얘기하며 즐겁게 명절을 보내지만, 요즘 젊은 새댁이라면 스트레스 받아 남편에게 짜증내며 돌아오는 차안에서 싸우고도 남지 않겠습니까.

▲곽병진=제 경우 전 굽고 차례 음식 준비하는 걸 온 가족이 함께 해요. 아버님도 제가 어릴 때부터 음식 하시는 모습을 보이셔서 명절에 남자가 방에서 TV만 보는 분위기와는 많이 다르죠. 어릴 때부터 몸에 배어 자연스레 하고 있지만, 명절 3박4일 동안 아내가 차려주는 음식과 술상을 받는 친구들이 너무 편해 보여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웃음)

▲김정기=언제부턴가 명절에 음식을 먹고 나서 형님이 설거지를 하는데 동생도 눈치껏 쫓아가더라고요. 순간 설거지를 해야 하나 고민이 됐는데 모른 척 했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가마솥에 밥하며 남자가 부엌일을 하는데 대해서는 개방적이지만 어릴 때부터 이런 일을 많이 하다보니 하기 싫어질 때도 있습니다.

▲곽=아내가 결혼해 처음 명절을 보내고는 우는 겁니다. 단촐했던 친정 분위기와 다르게 60명 대가족이 먹고 난 그릇들을 씻는 게 힘도 들었겠지요. 그래서 바로 식기세척기를 샀습니다. 차라리 이런 방법이 아내의 마음도 풀어주고 현명한 것 같아요.

▲김=옛날과 달리 요즘엔 먹는 음식이 흔해지다 보니 명절에 준비하는 음식 양도 줄어 자연 일도 주는 편 아닙니까. 명절 가사 노동으로 스트레스 받는 아내에게 바가지 긁혀 힘든 것보다는 경제적인 부분을 남편들이 더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을 찾아뵈러 가면서 손에 뭘 들고 가나 고민되고 형제, 동서끼리 비교가 안 될 수가 없어 스스로 마음이 위축된다고 얘기하는 남편들이 많습니다.

▲이=동감합니다. 형제가 다같이 잘 살지 못하는데 누구는 50만원 이상 내놓는데, 자신은 10만원밖에 못 내놓는다면 아이들까지 기가 죽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요. 동서끼리도 전문직에 있는 경우 두툼한 봉투를 내놓는데 그렇게 못 주는 주부는 열 받고 그걸 보는 남편은 더 열 받아 아예 안 가고 그런 모습도 안 보겠다고 말하는 경우도 봅니다.

▲김=본가, 처가에서 지내는 설, 추석 명절과 부모님 생신만 쳐도 1년에 8번이고 그 외 제사도 있는데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남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내 주머니가 두둑하면 아내에게 폼 나게 돈 봉투도 쥐어주고 그러면 일하는 물소리도 철철 힘찰 텐데 그러지 못해 스스로 마음이 위축되는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지요.

▲곽=아내들도 문제입니다. 시집에 다녀오거나 친구끼리 모이면 누구는 연봉이 얼마고 집이 몇 평이고 차가 뭐라는 등 건설적이지 못한 얘기를 늘어놓으니 명절 스트레스까지 더해져 꼭 부부싸움을 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아내들도 대부분 남편의 마음을 이해는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속이 상하니 털어놓을 데는 남편밖에 없고 그러다가 도가 지나치게 되면 명절 뒤 부부싸움으로 한달 씩 소원하게 지내기도 하는 거죠.

▲김=특히 경상도 남자들은 마음은 있어도 아내에게 잘 표현을 못하지 않습니까. 남편들도 고생하며 일하는 아내가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표현을 못할 뿐이지요. 그런데 아내의 표현이 너무 지나치면 오히려 남편도 반대로 맞부딪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곽=남편이 아내의 명절 스트레스를 풀게 만드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 것 같습니다. 여행을 가거나 외식을 하는 등 꼭 돈이 더 들게 되는 거지요.

▲이=화가 나면 가만히 놔두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여행도 같이 안 다닌 부부는 여행 말 꺼냈다가 또 싸우게 되는 거고 그저 세월이 약이지요.(웃음)

▲김=핵가족화가 돼 자식 세대 때는 명절에 모이는 가족 수도 더 줄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각지에 흩어져있던 형제들이 명절에 모이면 세상 돌아가는 정보도 나누고 우의를 다져 좋지 않습니까. 옛날 그대로 따르는 답습이 아니라 전통을 근간으로 합리적으로 현실성 있게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형제끼리 형편이 닿는 대로 현명하게 역할을 분담하는 방법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요즘엔 동서끼리 서로 음식도 나눠 맡아 준비하는 집들을 더러 보게 됩니다.

▲곽=세뱃돈도 형제끼리 금액을 의논해서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이들도 당연히 받는다는 식이 아니라 고마움을 느낄 줄 알도록 교육할 필요가 있고요.

▲김=어찌됐든 갈수록 명절에 여자들의 가사 노동 부담보다는 경제적인 부분 등 남자들의 부담이 더 커질 것 같습니다. 어떻게 설 준비는 잘 돼갑니까.(웃음)

정리·김영수기자 stella@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참석자=이승호(50·대구답사마당 대표), 김정기(41·서양화가), 곽병진(37·아자리에 대표·디자이너) 씨.

사진 : 남자들의 명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정기, 이승호, 곽병진 씨.(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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