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광장-양동리의 풍광

고즈넉한 반가 고택이 있어 아름다운 민속마을 안강읍 양동리 초입에는 기계천과 형산강이 만나는 삼거리가 있다. 포항에서 안강 쪽으로 내닫다 보면 삼거리 신호등 앞에 머물게 된다. 왼쪽으로 조금 눈길을 돌리면 두 물이 만나는 편안한 풍광이 펼쳐진다. 두 물줄기가 만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에 서면, 불어난 강폭의 물이 넘쳐나거나 서로 부딪치며 내는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저 편안하게 서로를 아우르고 다독이며 다시 더 큰 흐름으로 유유자적 더 낮게 흐를 뿐이다. 우리들 일상사에는 서로가 만나면 다툼이 있게 마련이고,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려 하지만 물은 아무런 불평이 없다.

물의 위대함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데 있다.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되고 주전자에 담으면 주전자 모양이 된다. 그렇지만 물은 자기 정체성을 포기한 적이 없다. 불 난 곳에는 건질 물건이 있지만 물이 지난 데는 건질 물건이 없다는 말처럼 물은 담기고 나면 곧장 선명해지고 정화되어진다. 요리할 때 끓이는 물은 음식 맛을 순화시킨다. 물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자기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깊은 고집을 가지고 있다.

물은 개별적이지 않다. 한 방울의 물은 증발하게 마련이고, 큰 흐름이 나눠지고 나눠지다 보면 목적지 바다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게 된다. 바다는 한 방울 한 방울의 물이 모여서 이루어지지만 물길을 따르지 않는 물은 바다에 도달할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인간은 개별적이고 마음이 있어 욕망한다.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저서에서 "생명이 있는 개체는 이기적이다"라고 영국의 생물학자 도널드 디킨스가 지적하듯 모든 개체는 결코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가능한 한 더 많은 먹이를 원하고 더 많은 짝짓기를 통해 번식을 할 뿐이다. 인간 본성에 내재된 권리를 요구하는 인권은 강하면 강할수록 국가의 질서에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하고 크게 부딪치는 소리를 낸다. 결국 이기적으로 질서를 왜곡하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더 큰 아우성을 유발한다.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도 마찬가지다. 인체라는 다세포 생물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하나하나의 개별적 세포가 전체 신호에 질서 있게 순응해야 한다. 신호는 단백질과 단백질 사이 릴레이를 통해 유전자에 전달된다. 때로는 자기 마음대로 분열하면서 이웃 세포들을 밀어내는가 하면 다른 부분을 침범하는 세포도 생긴다. 이렇게 마구 날뛰는 세포가 바로 암이 된다. 전체 세포 집단에 재앙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 고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러나 이기적으로 남을 배려하지 않는 세포의 재앙은 목소리 큰 사람의 권리만 보호하고, 침묵하며 순응하는 다수의 권리가 무시되는 현실에 비유될 수 있다. 개별적인 삶은 어디까지나 전체적인 조직의 질서에서는 양보되어야 할 가치이다. 법(法)을 파자하면 수(水)+거(去)이다. 물이 물길을 따라 흐르는 것은 보호하지만 따라오지 않는 물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 본질이 그곳에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감성적인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법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냉혹함이 바다에 도달하기 위한 더 큰 질서를 지키는 자연적인 물의 질서임을 배워야 한다.

물은 흐르면서 자기를 정화하고 새로워진다. 80년대의 이념 운동이 주는 의미는 그 시대의 공간과 시간에서 대중성을 확보하였다. 그때 느낀 노동운동이나 북한에 대한 접근이 이제는 절대선일 수 없다. 우리의 시계는 2006년을 향하고 있다. 그때 약자로서 명패를 던진 사람은 권력의 중심에 서 있고, 목소리에 힘을 실었던 힘센 사람들은 초라한 자연인으로 돌아갔다. 물은 정지하면 썩는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듯이 시간은 새로운 질서의 개념을 바라고 있지만 우리의 시계는 그 시대에 멈춰진 채 정지해 있는 것만 같다.

봄철이 가까워지면 형산강, 기계천의 긴 둑 좌우로 푸른 풀빛이 짙어오는 광경이 눈부시다. 누가 지성으로 심어놓은 유채꽃이 노랗게 둑을 물들인다. 그러나 나는 그 풍광보다 긴 둑을 유장하게 흐르는 두 물의 만나는 의미에서 더 깊은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상곤 대구한방병원 안이비인후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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