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릴레이 이런 삶-한복 패션디자이너 이영희씨

한복의 세계화 이끈 종부의 딸

지난해 11월 부산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행사의 피날레로 21개 회원국 정상들이 기념촬영을 할 때 두루마기를 입은 게 눈길을 끌었었다.

이를 제작했던 한복 패션 디자이너가 바로 지역 출신의 이영희(李英姬·70) 씨다. 이씨는 한복 디자인에 관한 한 세계 1인자로 꼽힌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여사, 세계적인 팝스타 마이클 잭슨, 음악가 정경화 씨, 여러 할리우드 스타 등 그가 만든 한복을 입은 국내·외 유명 인사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입생로랑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들과 함께 바비 인형의 의상도 만들었고, 세계 최초로 평양에서 패션쇼를 갖기도 했다.

그렇다고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해외 유학 같은 체계적인 수련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었다. 종갓집 맏며느리였던 어머니의 한복 바느질 솜씨를 어릴 적부터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운 것을 밑천으로 삼았다. 게다가 평범한 주부로 20년을 보낸 마흔 살이 돼서야 뛰어들었던 늦깎이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이씨가 국제 패션계에서 급부상한 계기는 지난 1993년 프랑스 파리에 진출한 뒤의 첫 한복 패션쇼였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자고 일어나니 대 스타가 돼 있었다"는 것이다. 현지 언론들이 당시 패션쇼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급기야 서울에까지 몰려와 취재경쟁을 벌였다고 한다. 이씨는 "한복의 세계화 가능성을 알린 중요한 무대였고, 처음으로 전통 한복의 현대적 변화를 시도한 '모던 한복'을 세계에 선보인 날"이라고 떠올렸다.

당시까지만 해도 '코리안 기모노'로 불렸던 우리 옷의 명칭도 '한복(Hanbok)'으로 바뀌게 됐다. 이후 7년간 파리를 오가면서 패션 공부를 계속했다. 2000년 미국 뉴욕으로 진출, 세계 최초로 카네기홀에서 패션쇼를 열었으며 2004년에는 현지에 이영희 박물관도 세웠다.

1936년 대구 삼덕동에서 태어난 그는 삼덕초등학교와 경북여중·고를 졸업한 후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결혼했다. 막내가 고교에 다니던 지난 76년, 마흔 나이로 솜 장사를 시작한 뒤 서울 신사동에 '이영희 한국의상' 가게를 오픈, 한복을 만들었다. 이후 박물관이나 도서관을 찾아다니면서 전문 지식을 쌓았고 성신여대 염직공예과에도 진학했다.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미국 워싱턴과 뉴욕, 일본 나고야, 이탈리아 밀라노, 중국 베이징,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지에서 한복의 우수성을 홍보하면서 국제적인 패션 흐름을 체득했다. 이를 토대로 파리 컬렉션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했던 것이다.

그는 "대구 섬유산업도 디자인 쪽에 주력하면 성장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강조한 뒤 "전시장 등 건물과 부지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 유명 디자이너들을 지원하고, 이들 의견을 적극 수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서봉대기자 jinyo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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