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벼르고 벼르다가…

젊음으로 펄펄 뛰던 청년시절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후방에 남겨두고 한탄강 북쪽에서 군복무를 하였다. 복무 기간 동안 후방으로부터 200통에 가까운 편지들이 날아왔다. 거의 대부분은 연인이 보낸 편지였지만 형제나 친구가 보낸 것도 있었고, 아버지께서 먹물로 적어 보낸 한시 작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설한풍 몰아치는 최전방에서, 후방에서 날아온 편지들은 어머니의 가슴처럼 따뜻하였고, 따라서 나로서는 편지들을 도저히 그냥 내다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참으로 기이하게도 그 당시 복무규율에는 사사로운 편지들을 절대로 보관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런 사례를 본적은 없지만, 편지를 보관하다 발각될 경우에는 영창을 간다는 가공할 소문도, 이리저리 떠도는 눈송이처럼 졸병들 사이에 떠돌아 다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편지들을 낱낱이 다 모으기로 결심하였다. 마침 근무하고 있던 행정반 천장에 환기를 위한 사각형 구멍이 크게 뚫려있었고, 따라서 그곳은 비밀리에 편지를 보관하기에도 그런대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한 밤중에 보초를 서고 돌아오다가, 책상 위에다 의자를 올려놓고 그 구멍 속으로 기어 올라가 천장의 저쪽 깊숙한 귀퉁이에 편지들을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전역을 하기 전날, 부하들이 마련한 최후의 술자리에 참석했다가 그만 오랜만에 대취하고 말았다. 그 이튿날 아침 간신히 전역 신고를 마치자, 즉각적으로 상급부대로 이동되었고, 상급부대에서 신고가 끝나자 참으로 오랜만에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제 당연히 편지를 가지러 부대로 다시 돌아가야 했지만, 해방된 그날, 갑자기 정수리에 엔돌핀이 솟구치고 가슴이 굵게 뛰던 그날의 나로서는 편지보다도 후방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께 돌아가는 일이 훨씬 더 급했다. 편지들이야 언제든지 다시 와서 가져가면 되니까.

그날 이후로 그 편지들을 가지러 가야겠다고 참 오랜 세월을 벼르고 별렀지만, 한 때 영창에 갈 각오를 하고 비장하게 모은 편지들을 끝내 다시 가져올 수 없었다. 벼르고 벼르다가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화들짝 달려가 보았더니, 새 막사의 건립과 더불어 그 편지들이 모두 초역사적 공간으로 증발되어버린 지가 이미 오래였던 것이다. "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 날 가 보려,// 벼르다 벼르다// 이젠 다 자랐소."라고 노래했던 정지용의 동시 '별똥'처럼!

이종문 계명대 사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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