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답다. 능선의 나뭇가지를 뒤흔든 찬바람이 사정없이 가슴을 파고든다. 두꺼운 장갑을 껴도 스며드는 냉기를 막을 수 없다. 그래, 겨울 아닌가. 추울수록 겨울다운 법. 애써 마음을 다잡고 나자 한결 낫다.
하필이면 올 들어 가장 추운 지난 3일. 경남 거창의 우두산(牛頭山) 의상봉(義湘峰·1,046m)에 올랐다. 의상봉은 2, 3시간의 짧은 산행을 하면서도 고찰과 약간의 가파른 산길, 우뚝 선 바위산을 오르는 스릴까지 맛볼 수 있는 곳. 대구에서 가깝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가조온천까지 끼고 있어 가족산행지로도 손색이 없다. 특히 춥고 해가 짧아 긴 코스의 산행이 부담스러운 겨울철 산행지로도 어울린다. 따뜻한 날이라면 아이들과 함께 고견사까지의 가벼운 산행으로도 딱 맞는 곳이다.
산행 출발지는 고견사 주차장. 오른쪽에 계곡을 끼고 5분여 산길을 따라가면 20여m 높이의 견암폭포(고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설 이전 따뜻했던 겨울 날씨 때문이었는지 아직 완전히 얼어붙지는 않았다. 등산로 우측의 계곡으로 들어가 한겨울의 시원한 폭포를 보며 잠시 시름을 잊어도 좋을 듯하다. 폭포 오른쪽의 바위는 예전에 암벽등반을 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하긴 이곳 폭포도 꽁꽁 얼어붙었을 땐 빙폭연습장으로 활용했었다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견암폭포에서 25분을 더 오르면 고견사(古見寺)다. 신라시대 때 절을 지으면서 쌓아올렸다는 석축이 눈길을 끈다. 하지만 절은 역사에 비해 크지 않고 아담하다. 정작 절보다는 고운 최치원이 심었다는 7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눈에 확 들어온다. 높이 27m의 나무 둘레가 6m10㎝나 된다. 의상대사에 얽힌 전설과 조선시대 때의 고견사 동종만이 유서 깊은 사찰임을 알려주고 있다.
고견사에서 오른쪽으로 산허리를 넘어 0.9㎞를 가면 쌀굴이 나온다.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수도를 할 때 매일 두 사람 분의 쌀이 나왔던 곳이라 해서 '쌀굴'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 쌀굴은 일부러 찾지 않아도 의상봉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둘러볼 수 있다.
고견사에서 의상봉까지는 1.5㎞. 돌길이면서 가팔라 50여 분은 잡아야 한다. 대구 카라코람산악회에서 개척한 암벽등반길인 '실크로드' 입구를 지나면 거대한 절벽이 앞을 가로막아선다. 여름이면 절벽 아래 샘터에서 식수를 채워가기도 한다. 샘터 옆에는 촛불을 켜 두는 단상이 마련되어 있다. 누군가 여기까지 애써 산행을 하며 소원을 빌었으리라. 빽빽하게 꽂혀 있는 촛불만큼 희망이 영글었으면 하고 빌어본다. 조금 위쪽의 황동불상 앞에서도 소원빌기는 여전하다. 이렇게 추운 날 불상 앞에서 절을 올리던 한 아주머니가 급하게 일행을 불러세운다. 귤 3개를 건네주며 먹고 가란다.
이가 시릴 정도의 찬 귤을 먹고 힘을 내본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더 가파르다. 오르기가 힘들다 싶을 정도면 의상봉 왼쪽 아래 능선에 닿는다. 능선을 넘어 바로 내려가면 의상봉을 오르기 위해 둘러가는 길이고 왼쪽방향으로 2.7㎞를 가면 장군봉이다. 오른쪽은 의상봉을 바로 오르는 릿지. 하지만 전문산악인도 오르기 어려울 만큼 길이 험하고 위험하다. 중간에 밧줄이 매여 있기도 하나 오래돼 믿을 수 없을 지경. 중간쯤 오르다 쌓여 있는 눈 때문에 미끄러워 포기하고 만다. 때론 물러서는 것도 용기다. 만용을 부리기보다 둘러가되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게 현명하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의상봉 턱 아래엔 철계단이 달려 있어 비교적 안전하게 오를 수 있다. 그렇다고 얕잡아볼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계단이라지만 철사다리라는 표현이 오히려 맞다. 얼어붙은 철계단을 엉금엉금 기어오르면 의상봉 정상이다.
의상봉은 우두산 아홉봉우리 중 주봉이다. 시원한 조망이 추운 날씨마저 잊게 만든다. 88고속도로 거창휴게소 뒤쪽의 비계산과 북쪽으로 보이는 수덕산, 서북서쪽의 덕유산~남덕유산능선, 기백-금원산 능선, 황석-거망산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어지는 산봉우리의 파노라마가 장관이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가조분지도 풍경에 한몫을 해낸다.
하산은 올라온 길의 반대편 길을 따른다. 의상봉에서 계단을 내려와 오른쪽으로 난 고견사 가는 길이다. 고견사까지는 1.2㎞. 능선을 따라 직진하면 가야산과 이어지는 코스이나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산행 후 돌아오는 길에 가조온천에서 피로를 풀어도 좋다.
▶산행코스(산행시간 : 2시간5분)
고견사 주차장→고견사(30분)→황동좌불(20분)→의상봉 아래 능선(10분)→의상봉(15분)→고견사(30분)→주차장(20분)
글·박운석기자 dolbbi@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