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프 레잉어의 감동을 가슴에 안고 남쪽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시련은 이제부터다. 계속되는 폭우로 손발은 꽁꽁 얼고 피가 통하지 않아 감각이 없다. 비를 피할 장소도 마땅치 않아 테 푸키(Te Puki)까지는 비를 맞을 수밖에 없다.
백패커스에서 하룻동안 지친 몸을 회복시키고 다시 아와누이(Awanui)로 향했다. 홀리데이파크에서 텐트를 치기로 계획했기 때문. 하지만 아와누이 시내에서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차가 비보호 우회전을 하는 바람에 충돌하고 만 것. 다행히 몸은 다치지 않았지만 자전거의 앞바퀴가 심하게 파손됐다. 차량운전자는 70세의 마오리족 할머니. 객관적으로 봐도 상대차량의 잘못이었고 운전자에게도 여러번 차량의 과실을 확인했으나 자전거 숍에서 수리비 견적이 나오자 이 할머니는 수리비를 부담할 수 없다고 딴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일단은 면허증을 디카로 찍어두고 연락처를 받고 헤어졌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간신히 왕가레이한인회와 연락이 닿았다. 다급한 상황을 설명하니 두어 시간 뒤 한국인 두 분이 100km도 넘는 거리를 달려왔다. 강석균 목사와 케리케리에서 농장일 알선을 해주고 있는 정왕채 씨였다. 두 분 덕택에 사건을 원만히 해결했다. 단지 같은 동포라는 이유만으로 아낌없는 도움을 주신 두 분께 다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뉴질랜드에서는 교통사고가 나면 경찰을 부르지 않고 쌍방에서 보험회사를 불러 해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본인이 잘못이 없다고 생각되면, 그리고 사고당시 현장의 증거와 목격자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면 무조건 경찰을 불러야 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무조건 오케이오케이 하다가는 뒤집어쓰기 십상이다.
90마일 비치에서 하루를 더 묵고 난 뒤 정왕채 씨가 살고 있는 케리케리로 갔다.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농장일을 하며 거주하고 있다는 백패커스로 가보니 여러 개의 방갈로에서 한국인들이 집단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방학을 맞아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현지의 학생들도 있고 뉴질랜드 영주권을 얻기 위해 한국에서 건너와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곳에서 농장일을 하면서 일정기간 이상 체류하게 되면 '워킹 퍼밋'이 나온다. 먼 나라까지 와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는 어쩐지 여유로움보다는 삶의 피로함이 보여서 우울했다.
왕가레이에서는 강석균 목사의 동생이 살고 있는 '야곱의 우물'에서 하루 신세를 졌다. 한국에서 왕가레이로 유학온 학생들을 위해 목사가 집을 구입하여 숙소로 제공하고 있다. 덕분에 비가 오는 날씨에도 편하게 쉴 수 있었는데다가 한국음식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고 다음날 도시락까지 싸서 출발할 수 있었다.
귀국하는 날까지 일정에 여유가 생겨서 동쪽 해안을 따라서 쉬엄쉬엄 오클랜드로 향했다. 그러나 오클랜드로 진입하면서 자동차만 통행할 수 있는 모터웨이(motor way)를 돌아서 가야 되었기에 길찾는데 무척이나 힘들었다. 무려 다섯 시간이나 헤매고 다니다 결국에는 길을 잘못 들어서 모터웨이로 진입해버렸다. 역주행해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라 다음 갈림길이 나오면 빠져나갈 생각으로 페달을 밟는데 뒤쪽에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사정을 설명하자 원래는 벌금을 내야되지만 특별히 봐준다고 하면서 자전거를 철조망 너머로 넘겼다.
뉴질랜드 자전거여행은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새로운 풍경에의 감동과 타국에서의 따뜻한 동포애, 친절하게 대해주던 현지인들의 따스함을 느낄수 있었던 값진 여행이었다.
힘들었던 오르막, 루아페후산에서 북쪽으로 이동할 때의 맞바람, 케이프 레잉어에서의 폭우와 진흙탕의 비포장길, 어이없는 교통사고와 교체한 앞바퀴의 수십 번의 펑크, 오클랜드 근교에서의 길찾기…. 구석구석 즐길 수 있는 풍경들과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들과의 새로운 만남이야말로 자전거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김정문(31·자전거타기운동연합 대구본부 교육팀장)
후원 : GoNow여행사(로고 및 연락처)
사진: 1. 90마일 비치'의 끝없는 해변. 모래를 파면 피조개가 무한정 나오는데, 1인당 채취할 수 있는 양이 100개로 제한돼 있다 2. 여러 차례 부서지고 고장 나며 우여곡절을 겪은 나의 자전거. 비록 말썽은 많았지만 끝까지 버텨준 대견한 녀석이다 3. 오클랜드의 아오테아 광장에서 일요일마다 열리는 오픈마켓. 각종 골동품, 장식품, 옷가지 등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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