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혜리(8·여)의 취학통지서를 받았다. 혜리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있는 통지서를 받는 순간 목이 메어왔다. 지난 해에 이은 두 번째 통지서다. 혜리의 진단서(장애 1급)를 첨부, 다시 유예시켜야 했다. 내년에도 다시 취학통지서가 날아올까. 그때도 혜리는 다른 아이들처럼 초등학교에 갈 수는 없겠지.
혜리가 처음 바깥세상을 본 날, 남편과 나는 들떴다. 딸을 갖고 싶어 했던 우리 부부에겐 더할 나위없는 선물이었다. 외동딸로 자란 나, 남자형제 다섯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란 남편은 모두 딸을 바랐다. 큰아들을 낳았을 때 딸이 아닌 것을 아쉬워했을 정도니까. 누구보다 예쁘게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두 아들도 여동생이 생겼다며 좋아했는데….
혜리는 태어날 때부터 소뇌만 가진 채 태어났다. 다른 아이들처럼 잘 칭얼거리지 않고 행동도 부자연스럽다고 느끼긴 했지만 행여나 하는 마음에 해 본 정밀검사 결과는 충격이었다. 말문이 막혔다. 혜리와 비슷한 증세를 가진 아이들은 대부분 2살을 넘기지 못했다는 말도 함께 전해 들었다. 마음을 다잡았다. 어렵게 얻은 아이인데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혜리를 낳은 뒤 제대로 바깥출입을 해본 기억이 없다. 기껏해야 장을 보러 잠깐 나가는 것이 전부. 혜리를 혼자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달 호흡곤란 증세로 병원에 오기 전까지 힘들게나마 여느 아기들처럼 웃고 울기는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앞을 제대로 보지도, 말도 하지 못했다. 혼자서는 우유를 삼킬 수도 없었다.
남편이 운영하던 건축자재상이 지난 1998년 외환위기의 여파로 부도가 나는 바람에 많은 빚을 졌고 집도 압류당해 나도 일을 찾아나서야 했지만 혜리 곁을 지켜줘야 했다.
우리 집 세 남자는 혜리를 끔찍이 위한다. 무뚝뚝한 남편은 혜리 앞에만 서면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남자가 된다. 자주 안아주고 볼에 입을 맞추는 등 지극정성이다.
두 아들도 예외가 아니다. 병원에 들를 때면 껴안고 '오빠랑 뽀뽀할까'라면서 꼭 껴안아주고는 말을 붙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약간의 미소가 전부지만.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주위에서는 혜리로 인해 가족들이 고생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혜리는 우리 가족의 보물이다. 혜리가 '까르르' 웃을 때면 우리도 함께 웃었다. 혜리의 웃음은 우리 가족에게 한줄기 빛이었다. 혜리도 느낌으로 우리를 알아본다. 다른 사람이 제 몸을 만지면 인상을 찌푸리지만 나와 남편, 두 오빠가 만지면 살짝 미소를 짓는다. 지금은 인공호흡기에 가려 예쁜 웃음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혜리는 곧 병원 문을 나선다. 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받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인공호흡기를 빌리고 산소발생기 등 주변기기를 사서 집에 설치해야 한다. 모두 합해 1천만 원이 든다는데 여력이 없다. 다들 어렵게 사는데 도움을 청하기도 민망해진다.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이 혜리를 좀 더 자주 안아줄 수 있을 텐데….
민병순(45·여·남구 대명9동) 씨는 조금만 더 막내딸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상태가 좋아질 가능성도 거의 없고 언제 눈을 감을지도 모르지만 이제까지 혜리에게 든 돈이 전혀 아깝지 않다. 이미 혜리가 민씨 가족에게 '아낌없이 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해줬기 때문이다.
"주변에선 혜리가 이제까지 산 것이 기적이래요. 우리가 애지중지한 덕분인지도 몰라요. 앞으로 얼마를 더 버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까지 버텨준 것만 해도 고마워요. 병실에 있는 다른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걸 보면 혜리도 꼭 저 정도만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제가 너무 욕심을 부리는 걸까요?"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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