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디지털 三星'

1960년대 가난했던 시절, 당시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 고향의 인근 지역에 사는 사람이 이 회장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식구들이 아사할 지경에 처해 있으니 제발 좀 도와 주십사 하는 내용이었다. 며칠 뒤 편지는 반송됐다. 이병철 '사장'이라고 쓴 부분을 '총수'로 바꿔 써서 다시 보내 달라는 주문과 함께. 시키는 대로 다시 써서 보냈더니, 얼마 후 밀가루를 가득 실은 트럭이 와서 10포대를 내려 주고 갔다. 하루 세 끼 꽁보리밥도 제대로 못 먹어 부황이 들고, 쓰레기통에 버려진 복어알을 주워 먹고 죽는 사람이 속출하던 시절에 밀가루 10포대는 대단한 식량이었다.

그 무렵 이 회장 고향 동네 10대 처녀들은 대부분 제일모직에 취업했다. 이 회장 고향권 밖에 사는 사람들은 이를 아주 부러워했고 그쪽 동네에 줄 대고 싶어 안달을 했다. 국민학교, 잘해야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사 품앗이나 식모살이하다 입 하나 덜기 위해 일찍 시집가는 게 효녀 노릇의 전부였던 시절에 딸아이가 공장에 취직해서 돈을 번다는 것은 집안의 큰 경사였다. 여공이 된 딸아이가 부쳐 주는 월급은 적지만 궁핍한 시골 마을에서 집안을 윤기 나게 만들었다. 명절이면 정종 한 병 들고 깨끗한 캐시밀론 외투를 걸치고 귀가하는 여공의 멋진 모습은 시골 총각들에게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병철을 '조선 갑부'라고 불렀다. 대구에서 장사해서 돈 벌어 큰 공장을 지은, 나라에서 제일 가는 부자라고 알았다. 당연히 이병철은 마을의 자랑이었고 희망이었다. 그 후 반세기가 지난 현재 삼성은 이병철의 아들 이건희가 대를 이어 조선 갑부의 위용을 세계에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며칠 전 이건희 회장의 귀국 모습은 세계적인 기업가의 모습이 아닐 뿐더러 시골 촌뜨기들이 생각했던 갑부의 모습도 아니었다. 몰려든 취재진 앞에 노출된 모습은 피곤했다.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의 대표 기업가의 모습은 밝고 당당해야 한다. 적어도 경제인이 되고 싶은,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어린이'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대구 인교동에 걸렸던 보잘것없는 '삼성상회' 간판이 세계 주요 대도시는 물론 동남아'중남미'아프리카 변방까지, 지구촌 거의 전역에서 빛을 발하고, 올림픽'아시안게임 등 국제 경기장에서, 영국 프리미어리거의 강자 첼시의 가슴팍에서도 삼성의 로고는 살아 움직이고 있다. 2004년 연간 수익 15조7천억 원으로 100억 불 클럽에 가입했고, 총자본금은 국내 전체 상장사 대비 22.4%를 차지하는 삼성이다. 브랜드 가치 149억 달러로 세계 100대 브랜드 중 21위에 올라 있다. 이를 일구어 낸 삼성과 이건희 회장은 국내에서 왜 그런 모습이어야 하는지 국외자가 본다면 불가사의할 것이다.

8천억 원을 조건 없이 사회에 헌납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카린 밀수 사건 때 한국비료를 헌납했던 모양새를 닮았다. 그때와 다른 점은 현금이고 그 돈을 정부가 시민단체와 협의해서 사용하라고 한 점이다. 쿠데타 상황도 아닌데 헌납이 뭔가. 삼성 전 임직원들에게 근무시간 1%를 사회에 봉사토록 하겠다는 것은 또 뭔가.

반삼성 분위기에 질린 때문인가.예부터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건달이 있고,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한량도 있다. 또 짖는 개 돌아본다는 집념으로 무조건 달려드는 모리배들도 있게 마련이다.

잘못한 일이 있다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그 정도를 넘었다면 법의 심판을 냉정하게 기다리면 되는 일이다.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헌납인지 상납인지 거액을 내놓고 위헌 소송까지 포기한 일련의 행태는 시장경제를 믿고 기업가를 꿈꾸는 사람, 작은 기업을 키워 가는 사람들에게 절망의 메시지다.

디지털 첨단산업으로 세계를 주름잡는 삼성 지도부의 사고방식이 아날로그도 아닌 1960년대 촌뜨기 갑부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아이러니다. 갑부의 시대는 갔다. 다만 정중하게 총수라 호칭하게 한 옛날의 자존심은 지킬 수 있어야 한다.

金才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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