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위해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 상영일수)를 현행 146일에서 73일로 50% 축소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영화계는 철야농성, 대규모 장외 집회에 이어 배우, 감독 등의 1인 시위로 강경 대응하고 있다. 국민들의 여론은 한국 영화의 성장을 계기로 과거 스크린쿼터 유지론 일색에서 일부 바뀌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문화 논리와 경제 논리가 맞붙은 스크린쿼터를 어떻게 봐야 할지 쉽지 않은 현실이다.
▨ 정부 입장과 배경
정부는 스크린쿼터 축소 이유로 올해 내에 국익에 긴요한 한·미 FTA를 맺는다는 대원칙과 함께 한국영화가 충분한 경쟁력을 갖췄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실제로 최근 3년 간 한국영화 점유율이 50%를 넘어섰고 흥행에 성공한 영화 가운데 상당수가 한국영화였던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정부로서는 미국이 협상의 선결 조건으로 내건 스크린쿼터 축소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이다. 스크린쿼터 축소로 영화계가 입을 피해보다 훨씬 큰 경제적 이익이 보장되는 FTA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한국영화의 호황으로 여론이 영화인들을 일방적으로 편들어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 영화계 반발 이유
영화계에서는 스크린쿼터가 한국영화 발전의 토대였다는 점을 들어 '집단이기주의'라는 비난까지 감수하고 있다. 실제로 1993년 16%에 불과하던 한국영화 점유율이 그 해 스크린쿼터 감시단 발족 이후 95년 21%, 97년 25%로 점차 올라 2001년에는 40%를 넘어섰다.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가 축소되면 투자가 위축돼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줄어드는 반면 외화 수입편수는 늘어나 어렵사리 높인 한국영화 점유율이 일거에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다.
절차적인 문제도 영화인들의 주장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스크린쿼터 사수를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고, 최근까지 축소는 없다는 입장을 확인했으며, 축소하더라도 영화계와 충분한 협의를 거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무시됐고 설 연휴 직전 기습적으로 발표됐다. 미국의 일방적 지시에 굴복한 게 아니냐는 비난은 영화인들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다.
▨ 미국과의 협상 과정
정부가 굴욕적 협상이라는 인상을 주면서까지 스크린쿼터를 절반이나 축소한 것은 미국의 고압적인 협상 자세에 밀렸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미국은 지난해 말 한·미 FTA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스크린쿼터를 73일로 못박고 "더 이상의 양보는 없다"고 통보했다. 한국측이 80~90일 정도로 줄이는 방안을 타협책으로 제시했으나 미국의 입장은 완강했다. FTA를 하거나 안 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강요나 다름없었다.
이에 따라 정부 관계부처는 수차례 회의를 했지만 영화계의 반발 때문에 쉽게 결론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미 의회가 행정부에 위임한 무역협상 시한이 내년 7월1일로 끝나는데다 6개월의 사전통보 및 보고 절차를 거치려면 남은 시간은 1년뿐이다. 게다가 FTA의 큰 걸림돌이던 쇠고기협상이 전격 타결되면서 스크린쿼터 문제 처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결국 정부는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전격적으로 스크린쿼터 축소를 결정했으며 재조정 계획은 없다고 강조했다.
▨ 한국영화의 미래
스크린쿼터 축소 이후 한국영화가 어떤 길을 걷게 될 지에는 찬반 입장에 따라 전망이 엇갈린다. 영화계의 우려처럼 영화산업의 기반 자체가 몰락할지, 영화인들의 우려가 기우에 그칠지는 지금 단계에서 점치기 어렵다. 그러나 스크린쿼터 축소 이후 벌어질 상황은 어느 정도 예측해볼 수 있다.
일단 소수의 흥행 대작을 제외하고는 한국영화가 설 자리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극장들은 73일의 의무상영일수라면 한두 편의 한국영화 흥행작만으로도 충분히 기간을 채울 수 있기 때문에 확실한 흥행 가능성이 없는 영화에는 관심이 그만큼 떨어질 것이다. 영화인들이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돼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기회 자체가 봉쇄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유다. 할리우드 영화가 막강한 자본력과 대작들을 앞세워 극장을 발아래 두려 할 게 뻔한 상황이라면 지금도 심각한 한국영화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게 분명하다. 되는 영화는 더 잘 되고, 안 되는 영화는 완전히 망하는 것이다. 안전한 흥행을 노리는 제작자들은 대규모 제작비와 스타캐스팅을 내세운 영화 제작에 몰두할 것이고, 중소 규모 예산의 좋은 영화들이 극장에서 상영되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이는 미국과 한국의 영화산업 규모만 비교해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400억 원 이상의 제작비를 들인 영화를 연간 600여 편씩 만들어내는 미국에 비하면 한국 영화산업은 구멍가게 수준이다. 여기에 배급논리가 보태지면 결과는 참혹할 수 있다. 메이저 영화사들이 내놓은 블록버스터를 상영하기 위해 극장들이 직배사의 요구에 응할 경우 한국영화는 비수기에나 개봉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 축소론의 배경
스크린쿼터 축소에 찬성하는 이들의 논리는 한국영화가 할리우드 영화에 맞설 경쟁력을 지녔다는 점을 내세운다. 45억 원을 들인 '왕의 남자'가 2천억 원을 들인 '킹콩'보다 2주 늦게 개봉되고도 흥행에서 크게 앞선 사례가 충분히 이를 입증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극장을 찾은 관객 1억4천151만 명 가운데 한국영화를 본 관객이 59.1%나 되고, 수출 또한 계약액 기준 7천599만 달러로 1998년 307만 달러의 25배를 기록한 점도 근거가 된다.
축소론자들은 또 한국영화 발전의 원인이 스크린쿼터 유지보다 한국영화 자체의 경쟁력이 꾸준히 높아진 데 있다면서 스크린쿼터 축소로 상영관 확보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면 한국영화도 그만큼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외국의 사례
자국 영화를 보호하기 위해 1927년 영국에서 처음 시행된 스크린쿼터를 현재 시행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스페인, 브라질, 그리스 등 모두 8개국이다. 프랑스의 경우 TV의 영화 방송을 유럽 영화 60% 이상, 자국 영화 40% 이상으로 규정한 방송쿼터제를 통해 다른 방법으로 자국 영화를 보호하고 있다. 그 결과 프랑스 영화는 자국 내 관객 점유율 30% 이상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중국이나 이집트 등도 다른 형태로 자국 영화 보호에 나서고 있다. 중국은 한해 해외영화 수입 편수를 20편으로 제한하고 있으며, 일본은 국내영화 전용관 시스템을 구축해 자국 영화 관객 점유율 30%대를 확보하고 있다.
▨ 바람직한 해법은
현 상황에서 스크린쿼터 문제의 핵심은 결국 한국영화의 자생력과 문화다양성 수호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하지도 않은 FTA의 이익을 앞세워 한국영화의 생존을 도외시하는 정부의 자세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스크린쿼터 축소가 가져올 상황에 대한 엄밀한 판단을 유보한 채 무작정 시장을 내주는 것은 부정적인 여론을 돌리기에도 부족하다. 무조건 50% 축소를 영화계가 받아들이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영화계와의 협의를 통해 축소 폭의 적정선을 재조정할 필요도 충분하다. 4천억 원 지원이나 독립영화관 확충 같은 미봉책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영화산업을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영화계에서는 여론의 추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 스크린쿼터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떨어졌는지, 영화계 자체의 문제점은 없는지 반성해볼 일이다. 스크린쿼터 사수라는 강경 입장에 걸맞게 자체적인 정화와 경쟁력 강화에 노력해야 한다. 비대해진 영화산업의 외형에 맞지 않는 비합리적인 제작 시스템, 독점적 거대자본의 돈벌이 수단 전락, 스태프들의 고용 불안과 전근대적인 노동시스템 등 고질적인 문제의 해법도 제시해야 한다. 이런 움직임이 없다면 아무리 스타 연기자와 감독을 앞장세워 반대 운동을 벌여도 국민적 지지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스크린쿼터, 자유무역협정, 할리우드 영화, 문화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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