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새벽 다섯 시의 안개가 억수 같습니다

앞산 네거리에서도 좀 올라간 언덕쯤이었어요

어디서 살다 오는지

사람들이 비인 듯 이슬인 듯 눈물인 듯

희망인 듯 아닌 듯 옵니다

떠듬떠듬 와서는

반벙어리 같은 덩어리 안개입니다

보리피리 소리 같은 건 전설처럼 감감하고

핏국집은 문 닫혀 속 쓰라린데

거멓게 죽은 이파리 달고도 꿈틀거리는 벤자민인 듯

만두피같이 얇은 남자들이

바싹 말라 슬퍼 보이는 낙엽,

비장하게 타는 연기 둘레에

아슬하게

참말로 아스라이 뭉쳐져 있었습니다

날 밝아 오는 앞산은

남자들의 머리카락을 닮은 빛깔을 내기 시작했어요

'인력시장' 고희림

노동(인간)을 사고파는 시장이 있다. 인력시장이다. 존엄한 인간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비정함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곳이다. 생활 수단이 노동밖에 없는 사람들, '새벽 다섯 시'에 모여 '나'를 시장에 진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명함이 없다. 직위가 없다. '반벙어리 같은 덩어리 안개'일 뿐이다. 비만한 자본에 억눌려 '만두피같이 얇은 남자들이'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잉여 노동(인간)이다. 인력시장의 상품성에서도 밀려, 팔리지 못한 그들은 '바싹 말라 슬퍼 보이는 낙엽' 같은 존재다. 그들끼리 '참말로 아스라이 뭉쳐져 있'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희망의 상징인 아침이 그들에게는 다시 시작되는 어둠이다. 그래서 '날 밝아 오는 앞산'의 푸름이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닮은 빛깔'일 수밖에 없다.

구석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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