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마음의 담장도 허무셨나요?

동네 시장 바로 앞에 작은 공원이 있다. 한길가 시장이라 늘 사람들로 복닥거린다. 하지만 그 소공원에는 흙장난하는 꼬마들이나 중고생들이 속닥거리는 모습들만 더러 보일 뿐 인적이 드물었다. 어딘가 으슥하고 퀴퀴한 냄새조차 풍겼으며, 밤이면 더욱 음침해졌다. 사람 냄새 풀풀 나는 시장통에서 그곳은 박제된 공원이 돼 동떨어져 있었다.

어느 날, 고집스레 서있던 담장이 사라졌다. 탁 트여 한결 넓어 보이는 그곳엔 알록달록한 놀이기구들과 벤치, 새로 심은 나무들로 완전히 딴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대구사랑운동시민회의는 도심 녹지 공간 확보와 이웃 간에 서로 터놓고 지내는 사회 분위기 조성을 위해 올해도 담장 허물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담장 허물기'는 자타가 인정하는 대구의 히트작이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도시들이 다투어 담장 허물기에 나서고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그어졌던 '금'들이 사라지고 사람과 꽃, 나무들이 어울리는 공생의 자리, 푸른 생명의 장(場)으로 바뀌고 있다. 아름다운 일이다.

다만 한 가지, 눈에 보이는 담장은 하나둘 허물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우리 속의 담장은 여전한 듯해 안타깝다.

올해 미국 수퍼볼 최우수 선수로 뽑힌 하인스 워드와 김영희 씨 모자에 세계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미국의 영웅이 된 흑인 아들과 키 작은 초로의 한국인 어머니. 하루에 3가지 직업을 전전하며 오로지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해 온 어머니다. 다행히 아들은 명문 대학을 거쳐 이제는 미국 최고의 풋볼 선수가 되어 그간의 고생이 기쁨으로 변했다. 그런 김영희 씨에겐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있다. 30년 전, 흑인 미군 병사와 결혼한 그녀에게 쏟아지던 주변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냉대를 결코 잊을 수 없다. 게다가 수년 전 한 방송사의 요청으로 어렵사리 귀국했을 때 어머니의 입원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가면서 차 안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방송 관계자가 등 뒤에서 침을 뱉더라는 것이었다. 그 후로 그녀는 다시는 한국을 찾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흑인이 아닌 백인과 결혼했더라도 그런 대접을 받았을까. 3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우리는 편협하고 완고하며 퉁명스럽다. 사회의 맨 밑바닥에서 그토록 힘겹게 가난하게 외롭게 살면서도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 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존경받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한때 워드는 노란 얼굴의 가난한 어머니를 부끄러워 했지만 이제는 전 세계를 향해 당당하게 "어머니는 나의 자랑"이라고 말한다.

한 지인이 있다. 따스한 마음씨에다 받기보다는 늘 베풀며, 세세한 부분까지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다. 아들과 며느리, 손녀에 대해 얘기할 때 그렇게 행복한 얼굴일 수가 없다. 그녀가 새어머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래서 모두 놀라게 된다. 너무나 진심으로 그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가끔 자신을 보는 제삼자들의 시선에서 상처를 받곤 한다. 낳은 정만 중시할 뿐 키운 정을 폄하하는 세상이 그녀를 아프게 만드는 것이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족이라는 개념도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이혼 후 혼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single mom)', '싱글 대디(single daddy) 가정에다 미혼모 가정, 혼인하지 않은 채 자발적으로 아이만 낳아 혼자 기르는 비혼모 가정, 동거 가정 등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최근엔 10대에 사실상 결혼 생활을 하며 아이를 낳아 키우는 '리틀맘(little mom)', 리틀 대디(little daddy)'도 늘어나는 추세다. 이른바 코시안 가정 등 국제결혼도 갈수록 급증하고 있다.

수년 전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손자를 얻었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그가 손자를 봤다는 사실보다 손자를 낳은 그의 딸이 결혼하지 않은 30세의 미혼모이며, 그런 자발적 미혼모 가정이 프랑스 전체 가정의 30%에 이른다는 사실이었다. 조만간 우리 사회에도 매우 다양한 형태의 가정들이 등장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도심 곳곳에서 산소를 뿜어대는 담장 없는 작은 공원들처럼 우리 역시 편견의 담장을 허물어야 할 때다.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