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더 숙여라

까치 소리 듣고 잠에서 깨면, 창호지를 적신 먹빛 어둠은 엷어지고 아침이 방문을 밝힌다. 창호지에 스미어 들어오는 투명한 햇살이 은빛으로 더욱 환해지니 골목은 소란스런 까치소리와 함께 하루가 바쁘게 열렸다. 더 이상 게으름을 안고 누워있을 수가 없어 자리를 털고 나오다가 문틀에 이마를 부딪쳤다. 번번이 이마를 찧는 문은 아무리 보아도 너무 작고 낮다.

점심 무렵에 친정어머니께서 다니러 오셨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고는 해도 바람 끝은 맵기만 한데, 십리 길을 또 걸어서 왔다고 하신다. 골짜기를 단장한 아스팔트길은 매끄럽건만 그 길에는 아직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어머니는, 택시 삯을 아까워하며 몸이 호강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발품을 팔더라도 속 편한 게 낫다며 번번이 걸어 다니시는 것이다.

점심상을 차리느라 안방에 드나들며 연신 이마를 찧는 모양을 보신 어머니는 내가 방문 앞에만 가면 "더 숙여라"고 주의를 주셨다. 당연히 머리를 더 숙이라는 의미였을 것이지만 어느 순간 그 이르심은 전혀 다르게 전해왔다. 어머니의 말씀은, 단지 머리만 숙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마저 다소곳이 숙여야 한다는 가르침이 되어 처음으로 귀를 열어 주었다.

시골집에 이사 온 후로, 문틀에 이마를 찧을 때마다 옛 사람들의 소견이 좁아 문 하나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며 불평을 했다. 그러나 고개를 깊이 숙이고 들어가야 안전한 안방은 집안의 어른이 기거하는 곳이다. 어른 앞으로 갈 때는 자세를 낮추고 마음마저 가다듬으라고 그렇게 문설주가 낮은 문을 달아놓은 것이 아닐까. 사랑채의 문은 머리를 숙이지 않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높고 크지 않은가. 사랑에는 가족보다는 손님이 더 많이 드나드는 곳이다. 내 집을 찾는 귀한 사람들에게 방으로 들어서면서 고개를 숙이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금 열린 마음으로, 한옥의 구조를 이해하려고 밤늦도록 궁리하다가 밖을 내다보니 달빛이 섬돌에 쏟아진다. 섬돌에 쏟아지던 달빛이 댓돌에 머물면 밤은 더욱 깊어간다.

섬뜰을 따라 걸으니 집 한 바퀴를 저절로 돌게 되었다. 섬돌은 뜰에서, 추녀 네 귀를 따라 돌며 땅을 돋우고 돌로 고았는데 댓돌은 왜 방문 앞에만 두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돌덩이 하나라도 꼭 필요한 곳에만 쓰겠다는 절약의 마음이 아닐까. 집주인은 다소 불편함을 감수하고, 집 짓는 사람의 노고는 최소한으로 줄였으며 목재와 석재 또한 넉넉히 쓰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돌아보니, 우리네 집은 직선보다 곡선이 많다. 지붕과 추녀의 선, 그리고 담장을 덮은 기와도 모두 곡선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복에서도 아름다운 선으로 여유를 보이는데 여의(如意)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다만 집을 짓는 사람이건만, 그곳에 살 사람의 앞날이 뜻하는 바대로 잘 풀리기를 바라며 기도하듯 모나지 않은 기둥을 세우고 담장을 쌓았으리라.

달빛이 온밤을 뜰에서 머무는 날이면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느끼게 된다더니 작은 오두막은 이 밤 스승이 되어 깨우침을 준다. 그제야 옛 사람들은, 집을 단지 사람이 사는 터전이라고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삶의 순리를 일깨우는 성찰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말이 생각났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만나는 집으로부터 성찰하면서 품성을 다듬었던 사람들, 우리 부모님들도 그런 집에서 살았기에 검약이 몸에 밴 것이 아닐까.

밤바람이 으스스해 댓돌에 신발을 벗어놓고 마루에 올랐다. 그리고 고개를 깊이 숙이며 방문을 열었다. 앞서 살면서 삶의 진실을, 보다 먼저 깨달았던 사람들. 그 깨달음으로 집을 짓고 타인(他人)의 삶마저 일깨우고자했던 선인(先人)들에게도 고개를 깊이 숙이고 방으로 들어왔다.

신복희(대구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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