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 이야기-(8)광복회사건과 장택상 가문

친일부호 장승원 피살

경술국치 이후 우국청년들의 일부는 공허한 이론공방을 거부하고 곧바로 무력항쟁의 길로 나선 경우가 적지 않았다. 경주사람 박상진(朴尙鎭)을 중심으로 한 '광복회'회원들이 친일부호들을 대상으로 국권회복운동자금을 강제모금하던 중, 1917년 11월 전 경북관찰사 장승원(張承遠)을 권총으로 살해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칠곡군 인동(仁同)의 거부였던 장승원은 1904년 봄, 당시 의정부 삼찬(參贊)직에 있던 왕년의 의병장 왕산 허위(旺山 許蔿) 선생에게 매달려 보직에 힘써주면 20만 원의 의병군자금을 내겠다는 맹약을 하고 경북관찰사직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08년 왕산이 일군에 잡혀 순국하자, 이 약속을 추궁하는 왕산 문하의 의병들을 오히려 고발하는 무리수를 저질렀다. 이 밖에 1934년 일제의 경북도 경찰부가 펴낸 '고등경찰요사'란 책에 따르면 장승원은 왕실 토지의 편취, 부녀자 구타살해 후 병사했다는 허위검안서 제출 등의 나쁜 소문으로 의병들의 징치(懲治)대상 제1호였다고 한다.

이에 박상진 의사의 지시를 받은 채기중, 강순필, 강찬순, 임봉주 등 4명의 광복회원은 권총을 휴대하고 11월 10일 장의 집에 잠입, "겨레를 위해 죽일 수밖에 없다"며 사살하게 된다. 이 사건 외에 충남 아산에서의 비슷한 사건 등으로 일경에 체포된 49명의 광복회원 중 박상진, 채기중, 강순필, 임봉주, 김한종, 김경태 등 6명의 의사는 1918년 2월 사형을 언도받고 순국하기에 이른다.

순국의사들은 50여 년이 지난 뒤에야 건국공로훈장들을 추서 받게 되지만, 이들의 유족이나 후손들은 한결같이 지독한 가난을 대물림하며 빈곤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반면에 장승원 가(家)는 누대에 걸쳐 권세와 영화를 누리는 대조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인 길상(吉相)이 은행장, 둘째인 직상(稷相)이 중추원 참의, 셋째인 창랑(滄浪) 장택상(張澤相)이 국무총리를 지낸, 대단한 이력의 소유자들이었다.

맏이인 길상은 부호인 아버지의 후원 아래 일찍 금융계로 진출, 일제하 대구 유수의 은행이던 경일(慶一)은행의 두취(은행장)가 되어, 가문의 재력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둘째인 직상은 1910년 경북 신녕(新寧)군수직과 함께 총독부 고등관직에 올랐으나, 형 길상이 경일은행을 설립하자 사업가로 변신, 이 은행의 전무를 거쳐 1927년에는 대구상의 회두(회장), 1930년에는 총독부 중추원 참의에까지 오르는 등 화려한 친일경력을 쌓았다.

가문이 지닌 재력에 힘입어 일찍 일본과 영국에 유학한 셋째인 택상은 유학시절 김성수, 송진우, 이승만, 조병옥 등 인사들과 사귄 인연으로 해방 후 대표적인 우익정당인 한민당 결성에 참여하고 수도경찰청장직에 올랐다. 그가 공산당의 제거대상 1호가 될 정도로 타공(打共)전선에서 괄목할 '전과'를 올린 것도 이때였다. 친일파청산을 제1의 과제로 삼던 좌익세력을 박멸함으로써 장택상은 나름대로 '살부지한(殺父之恨)과, 가문에 드리운 친일경력의 불명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알 수없다. 탁월하고 기발한 정치흡인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1950년에는 국회부의장, 1954년 5월에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국무총리에 올라, 부(富)에 이어 세속적인 명예마저 세상에 떨친, 장씨 가문을 중흥한 인물이 되었다.

박상진 의사 등이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받은 것처럼 민주수호와 민권투쟁으로 말년을 보내고 국립묘지에 안장된 창랑의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 또한 비록 시기와 형식은 다르나 앞서 간 순국선열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개인이나 가문이나 뒤끝이 중요하며, 그 때문에 광복회 회원과 창랑가문 사이의 앙금은 '건국'이란 공통분모를 통해 명부(冥府)에서나마 '화해의 강물'을 이루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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