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도(古都) 카잔. 우리 한국인에겐 낯선 이름의 도시다. 러시아 연방 자치국 중 하나인 타타르스탄의 수도다.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797km, 항공편으로는 1시간 20분, 기차로는 28시간 정도 걸린다.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로 갔던 우리는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가서 타타르스탄 항공으로 갈아탔다.
러시아 중동부 볼가강 중류쯤에 터잡은 타타르스탄은 인구 약 350만 명 내외로 타타르(tatar)족이 중심민족이며 그외 슬라브족과 다양한 소수 민족들로 구성돼 있다. 구소련연합 소속 여러 국가들이 독립했고 현재도 체첸 등이 독립운동을 계속하고 있지만 타타르스탄의 경우 나라 전체가 러시아에 빙 둘러싸여 있는 지형적 조건 탓에 독립보다는 러시아 연방으로 남아있기를 원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스탄'의 이름을 가진 나라들이 흔히 그렇듯 이곳도 이슬람적 분위기가 강하다. 타타르인은 슬라브인보다 얼굴선이 동양적이며, 표정들도 한결 밝고 순해 보인다.
카잔은 러시아에서 6번째쯤 되는 규모의 도시로 인구는 180만 명 정도. 유럽풍과 이슬람풍이 섞인 듯한 건축물들은 1천 년의 나이를 먹은 도시답지 않게 깨끗해 보였다. 전체적으로 아담하고 예쁜 도시라는 느낌. 어딜 가나 하얀 눈 천지인 건 이곳도 마찬가지. 오히려 러시아 다른 지역보다 강설량이 많은 편이라고 한다.
카잔 사람들은 이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럴만도 한 것이 러시아 혁명의 아버지 막스 레닌과 러시아 3대 문호이자 소비에트 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막심 고리키가 젊은 시절 한때를 보낸 곳이며,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플래티노프 등 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곳이다.
그래선지 도시 곳곳에서 예술적 향취가 묻어나는 듯했다. 시내의 레닌 동상이 있는 소공원주변에는 오페라하우스와 콘서트홀·콘서바토리,국회 등이 병풍처럼 빙 둘러서 있다. 마침 콘서트홀에서는 타타르스탄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회를 앞두고 맹연습을 하고 있었다. 지휘봉을 잡은 사람은 이 오케스트라의 유일한 외국인 지휘자인 노태철씨. 1966년 창단된 이 오케스트라는 연중 80여 회 정도 국내외에서 연주활동을 하는, 러시아의 대표적 오케스트라의 하나로 노씨 외에도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 콘서바토리 교수이자 볼쇼이극장 지휘자인 70대의 노지휘자 만수로프 씨와 카잔 출신 루트셈 잘랄라이 씨가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반갑게도 연주회장에서 대구의 피아니스트 김태욱 씨와 계명대 쇼팽콘서바토리의 정지교 군의 협연 리허설도 볼 수 있었다. 콘서트홀은 상앗빛 대리석의 기둥과 계단, 복도에 줄지어 선 음악가들의 석고상, 대형 파이프 오르간, 녹색의 벨벳 의자가 어울려 한껏 격조 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장편 소설 '어머니'로 일약 세계적 작가가 됐던 막심 고리키(1868~1936)를 기념하는 박물관은 시내의 조용한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얀 색의 아담한 건물 벽에 달린 그의 얼굴 동상이 방문객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전시실에는 러시아의 격동기에 파란만장한 69년의 삶을 살고 간 그의 흔적들이 먼 이국에서 온 나그네를 감회에 젖게 했다. 그의 친필 원고와 타이프 원고, 애용했던 안경과 책상·필기구 등 손때 묻은 유물들과 함께 가족사진과 여러 친구들과의 다정했던 시절의 모습, 레닌과 함께 있는 유화 등도 볼 수 있었다. 한글로 된 책 한권이 눈길을 끌었다. '고리키 선집 제10집 '나의 대학'. 아마도 북한에서 출판된 책인 듯했다. 지하의 희미한 램프불이 켜진 작은 방은 고리키가 젊은 시절 한때 일하며 잠도 잤던 방이라고 했다.
대통령궁이 있는 크렘린으로 가는 길 양 옆에는 카드 속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하얀 눈을 덮어쓴 침엽수들이 사열식을 하듯 줄지어 서있었다. '성벽'의 의미를 지닌 크렘린이 모스크바에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도시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러시아에 와서 처음 알게 됐다. 카잔의 크렘린은 눈처럼 온통 하얀 색의 성벽과 건축물들로 이루어져 있어 겨울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그 안엔 대통령궁과 러시아 정교회 성당, 이슬람 사원 등이 있다.
크렘린 입구쯤에서 갑자기 왱~하는 소리가 짧게 나더니 금방 그쳤다. 누군가가 타타르스탄 대통령의 차가 지나갔다고 말했다. 앞뒤에 경호차 한대씩만 둔 단촐한 행차가 권위적이지 않아서 정겹게 느껴진다. 대통령궁에서 보면 크렘린 내 러시아 정교회 성당과 이슬람 사원이 나란히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타타르인과 슬라브인이 조화롭게 살아가듯 두 민족의 종교도 서로 인정한다는 메시지다.
저녁엔 니즈니 노보고르드에서 지휘 공부를 하고 있는 대구의 피아니스트 김혜경 씨가 카잔의 쳄버 앙상블을 지휘하는 연주회에 갔다. 타타르스탄 오케스트라가 연주회를 갖곤 하는 콘서트홀 바로 옆의 또 하나의 콘서트홀로 100년쯤 된 건물이란다. 규모는 그리 크진 않지만 수십 개의 화려한 샹들리에와 벽과 천장을 수놓은 금박 장식 등 궁전을 연상케 하는 연주회장의 화려한 분위기에 입이 딱 벌어졌다.
니즈니 노보고로드행 밤기차를 탔다. 카잔에서 다시 모스크바 방향으로 되돌아가는 거다. 네 명씩 한 조의 침대칸. 러시아의 기차에선 차장이 차에 오를 때 여권과 표를 검사하고 기차 안에서 다시 검사를 한다. 기차 1량마다 한 명의 차장이 차표 검사 및 석탄 때기 등을 도맡는다. 지난번 페테르부르크행 기차를 탔을 땐 차장이 깜빡 졸다가 불을 꺼뜨렸는지 어쨌는지 한밤중에 오리털 파카까지 다시 입고도 덜덜 떨었던 기억이 났다. 다행히 이번 차장은 부지런한지 춥지는 않았다.
니즈니 노보고르드. 고리키의 고향이며 러시아의 젖줄 볼가강(江)이 흐르는 도시. 인구 400만 명 정도로 러시아 제3대 도시에 꼽힌다. 니즈니는 뉴(new)라는 뜻을 갖고 있어 기존의 노보고르드시와 구별하여 '새로운 노보고르드' 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한다.
김혜경 씨가 다니는 글링카 컨서바토리의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창문밖 하얀 몸통의 키 큰 자작나무가 소복히 눈을 인 채 인사하는 것 같다. "즈드라스부이쩨(안녕하세요)!" 건너편 건물 지붕의 고드름들은 또 어찌나 거대한지. 혹 지나는 누군가가 맞으면 어쩌나 괜한 걱정도 해본다.
이 도시를 찾은 건 볼가강(江) 때문이었다. 왜 그런지 막연히 그립던 강! 방금 떠나온 카잔에서도 저멀리 은뱀처럼 꿈틀대는 볼가를 볼 수 있었지만 역시 니즈니 노보고르드의 볼가가 제격이다. 숙소에서 걸어서 10분도 채 안되는 거리. 문득 한 200m쯤 눈 아래로 거대한 볼가가 나타났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북쪽의 삼림지대와 스텝지대,반(半)사막지대 등 러시아 평원의 4개 지대를 거쳐 카스피해(海)로 흘러드는, 길이 3700km, 유역면적 138만 평방미터의 유럽 제1의 강. 영하 24℃의 혹한 속에 볼가는 구불텅한 몸짓 그대로 하얗게 얼어붙어 있다. 강 건너편엔 드넓게 펼쳐진 새하얀 설원과 점점이 검은 숲. 불현듯 마오쩌둥(毛澤東)의 시 '심원의 봄눈(沁園春雪)'의 한 구절 "북국(北國)의 풍광(風光), 천리(千里)가 꽁꽁 얼어있고, 만리(萬里) 멀리까지 눈발 휘날리네~"가 그 위에 오버랩된다.
멀리 까만 점 하나가 꼬물꼬물 움직인다. 얼음낚시꾼인 모양이다. 얼음을 깨면 깨지는 순간 다시 얼어붙는 혹한 속의 낚시라니, 말릴 수 없는 낚시광인가 보다.
볼가강을 거닐다 보면 러시아 음악이 새롭게 다가온다던 어떤 이의 말을 떠올려본다. 라흐마니노프 음악이 제격이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시 우울한 낭만에 젖어본다. 하지만 아무리 얼굴을 머플러로 두껍게 감싸도 얼음처럼 차가운 강바람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체감 온도가 적어도 영하 30℃는 될 성싶다. 일행 중 누군가가 짐짓 엄살을 떤다. "아이쿠, 눈까지 얼 것 같애." 이런 날씨에 30분 이상 바깥에 있는 건 무리다. 볼가를 다시 한 번 눈에 담은 뒤 발길을 돌렸다.
니즈니 노보고로드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공연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이번 여행의 큰 즐거움이었다. 볼쇼이 발레단엔 못미치지만 상당히 수준급 발레단이라 한다. 저녁 8시, 오페라 떼아뜨르. 감미로운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배경으로 무용수들의 세련되고 유연한 춤사위가 나른한 몸을 깨운다. 지그프리드 왕자역의 발레리노가 전 러시아 1등 경력의 무용수라 그런지 특히 돋보였다. 하지만 무대가 단조롭고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덜덜 떨며 봐야 했던 것이 아쉬웠다. 인상적인 것은 꼬마 관객들이 휴식시간에는 돌아다니다가도 공연이 시작되면 제자리에서 꼼짝 않고 조용히 감상하는 모습이었다. 비록 경제적으론 넉넉하지 않아도 어릴 때부터 예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그 아이들을 보노라니 공부에만 찌들어가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서글퍼졌다.
어느 시인이 그렇게 읊었다. "모든 길은 초행길"이라고. 러시아의 진짜 모습을 보기 위해 일부러 겨울의 러시아를 찾았다. 난생 처음 겪는 혹한이 힘들기는 했지만 멋진 여행이었다. 설경(雪景)은 원도 한도 없이 봤다. 물기가 적어 밟으면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던 러시아의 눈!. 하얀 자작나무숲과 암록색 전나무숲! 눈천지 속에 오순도순 머리 맞대 있던 농가들! 러시아는 다시 그리움으로 젖어들고 있다.
카잔·니즈니 노보고로드에서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사진: 1. 카잔 크렘린 안에 있는 푸른 지붕의 이슬람 사원, 내부가 무척 화려하고 아름답다 2. 톨스토이와 레닌이 한때 공부했던 카잔대학(현 레닌대학). 오른쪽 길 옆에 청년시절의 레닌 흉상이 보인다 3. 니즈니 노보고르드 발레단의'백조의 호수'공연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여행에서 큰 행운이었다 4. 타타르스탄의 대통령궁이 있는 수도 카잔의 크렘린 전경.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우리 아기가 태어났어요]신세계병원 덕담
"하루 32톤 사용"…윤 전 대통령 관저 수돗물 논란, 진실은?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