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 독일 태생의 영국경제학자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가 아담 스미스(Adam Smith) 이래 200년 동안 지배해 온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에 반기를 들고 쓴 경제 비평서다. 하지만 현실은 작은 것을 남루하고 열등한 것으로 치부한다. 동네 구멍가게가 대표적 사례다. 앞으로 FTA(자유무역협정)가 속속 체결되면 구멍가게도 거대 자본을 앞세운 세계적 유통 체인과 경쟁해야 할 판이다.
그렇다. 크고 빠른 것은 미덕이고, 작고 느린 것은 지겨움이고 죄악인 시대다. 그래서 멸시하고 천대한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하에서 작은 것은 시장에서 계속 쫓겨나 시장 실패자 내지 낙오자가 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심화된 양극화도 이러한 시장 만능이 낳은 사생아다. 특히 조만간 개시될 한미 FTA 협정은 우리 삶의 기준과 사고를 미국식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에 맞추도록 강요해 양극화를 악화시킬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의 시장은 수많은 패배자를 딛고 일어선 극소수의 승자만을 찬양한다. 정부가 시장 실패자 구제 프로그램을 가동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 시장이 정부의 힘을 훨씬 능가할 정도로 커진 데다 시장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시장 만능주의자들의 훼방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은 완전하지도 공평하지도 않다. 소유의 양에 따라 자유를 부여하는 신자유주의가 세계적 불황을 해결 못하고 있지 않은가.
양극화로 대변되는 한국 사회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계층 고착화와 함께 빈부 격차는 점점 벌어지는 추세다. 성장보다 분배를 중시한다며 비판받고 있는 '참여 정부' 아래서도 승자와 패자의 간격은 더 벌어지고 있다. 양극화의 악화다. 요즘 이 양극화의 해법을 놓고 극한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다.
분배를 중시한다고 비난하는 야당이나 경제전문가들은 물론 국민도 현 정부 들어 양극화가 더 심화됐다고 비판한다. 양극화가 악화됐다면 분배보다는 성장에 치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뭔가 논리에 모순이 있지 않은가. 비판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현 정부 경제 정책의 문제점은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추진하면서 정책 방향이 일관성 없이 오락가락한 때문이지, 분배만을 중시한 때문은 아니다. 대표적인 오락가락 정책은 부동산 정책과 소득 재분배 기능에 역행하고 있는 조세 정책이다. 사회복지 지출의 확대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일 뿐 아니라 시대적 화두다. 그렇다 해도 저소득층의 주머니를 털어 저소득층을 돕겠다는 발상은 첫 단추부터 잘못 뀄다. 제 보리 주고 제 떡 사 먹을 바에야 애초부터 세금을 거두지 말 일이다.
증세와 감세 정책을 모두 비판하고 있는 경제학계도 고르디안의 매듭(Gordian knot)처럼 꼬인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혜안은 없는 것 같다. 참여 정부의 아마추어적 정책을 비판하면서도 내놓은 해법은 고작 과도한 규제를 풀고 시장에 맡겨야 투자와 고용이 늘어난다는 정도다. 하지만 불완전하고 불공정한 시장을 중시하면서 양극화 해소가 가당키나 한가.
신임 한국경제학회장인 서울대 총장은 취임사에서 알프레드 마셜의 케임브리지 대학 석좌교수 취임 강연을 인용해 '뜨거운 가슴, 차가운 머리'를 경제 관료들과 학자들에게 주문했다. 하지만 정부'여당과 야당은 물론 경제 관료와 경제학자들조차 '뜨거운 머리'와 '차가운 가슴'으로 무장한 크고 강한 자들의 사고와 이란성 쌍둥이처럼 닮았다. 차라리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외치며 인간과 자연환경의 조화를 경제학의 중심에 둔 슈마허가 그립다.
작고 느린 것에 대한 연민이나 옹호가 아니다. 작고 느린 것에 대한 배려를 통해 사회적 약자를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만드는 게 선진국이다. '현대판 천민'을 양산하는 '약탈 자본주의'의 추태를 답습하면서 선진국이 되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작은 것은 비록 남루할지 모르나 결코 죄악은 아니다. 추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曺永昌 논설위원 cyc58@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