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피플파워로 들어갈 조짐을 보이던 필리핀 정국이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의 국가 비상사태 선포로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독재자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전 대통령을 축출한 지 20년을 맞는 마닐라에선 지난 22일, 24일 시위에서 '글로리아를 몰아내자'는 플래카드와 함께 20년 전과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면서 세 번째 민중봉기 가능성을 보였다.
그러나 아로요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를 발동, 집회 및 시위를 금지하는 한편정적들에 대한 체포에 나서고 비판 언론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시민들의 체념속에 급속히 사태는 가라앉고 있다.
◇위기 1차 원인은 아로요의 부정과 무능 = 아로요 대통령이 위기에 빠지게 된것은 각종 부정 의혹에 휘말리고 부패척결과 경제개혁 등 대선 공약을 제대로 실현시키지 못한 탓이 크다는 게 현지인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2001년 부통령 당시 '제2의 피플파워'로 조지프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 후임으로 집권한 아로요 대통령은 2004년 5월 대선에서 유명 영화배우 페르난도 포 주니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대선 당시 일자리 창출과 생활수준 향상, 빈곤 척결, 부채탕감 등 사회.경제 개혁을 공약으로 내세운 아로요는 의회 중심제로의 헌법 개정과 사형제도를 옹호하고 미국 주도의 '테러와의 전쟁'에도 적극 동참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대선 당시 개표조작을 시도했다는 부정의혹이 제기되면서 지지도는 1년만에 바닥을 쳤다. 개표조작을 시도한 현장의 녹화테이프가 전국에 생중계되기도 했다. 이후부터 아로요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끊이질 않고 있다.
지난해 7월에는 아로요 대통령의 남편이 불법 도박조직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터져 나온데 이어 아들과 가족들이 연루된 부정의혹이 잇따라 불거졌다. 정권이 취약해진 틈을 타 지난 2003년 소장 장교들의 '불발' 쿠데타가 발생했으며 이후에도 쿠데타 설이 끊기지 않고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최근 남부 레이테섬을 휩쓴 대규모 산사태를 야당과 언론이정부의 책임을 거론하며 아로요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삼자 아로요는 최근 발생한 쿠데타 기도설을 빌미삼아 국가비상 사태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소수 가문이 독차지한 권력 = 필리핀 지식인들은 피플파워 후유증의 원인을 피플파워 자체보다도 극소수 유력가문이 필리핀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마르코스 시절의잔존 체제에서 문제점을 찾고 있다.
필리핀은 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까지 동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높은 경제수준을 유지했으나 마르코스 정권의 장기집권에 따른 부패와 이후의 개혁실패로 국가발전이 정체돼 '아시아의 환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피플파워 20주년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국민들은 '과연 그만한 노력을 할 가치가있었을까'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동안 아무것도 변한게 없다"며 정치인들에 염증을 드러낸 택시기사 페드로부투안의 말은 필리핀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다. 현재 필리핀내에는 아로요, 아키노, 마르코스 등 150여개 가문이 지방정부에서의회,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다. 의회는 호족 출신 의원들이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이고 15대 명문가족이 국부의 50% 이상을 점유하면서 연소득 270달러 이하 극빈층이 35%에 이르고 있다.
미국이 식민시대 이식한 민주주의는 당초 부유층과 지식인들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했고 각 지방 권력을 독점했던 가문들은 이 권리를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했던 체제가 피플파워 이후에도 붕괴되지 않고 더더욱 공고해진 것이다.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를 확보한 소수 유력 가문이 정권교체에 관계없이 정치및 사회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정당들도 노선이나 정책보다는 인물이나 가문을 중심으로 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각종 선거가 정책대결이 아닌 후보자 개인의 지명도에 판가름나는 인기투표의양상을 보여주는 것도 영화배우, 운동선수 출신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원인이 됐다. 특히 마르코스 시절 권력화된 군부가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갖고 여전히 쿠데타를획책하거나 정치에 간섭하는 것도 피플파워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 원인으로지적된다.
마닐라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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