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싹을 틔우고 나뭇잎도 생겨나는 등 병실 밖은 어느새 봄이다. 하지만 내(장인상·53·경북 문경시 불정동) 마음은 아직 한겨울. 일하던 탄광이 무너져 몸을 다쳤을 때도, 아들이 도박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꿋꿋이 버텼다. 세상살이는 원래 힘들기 마련 아니던가. 하지만 내 유일한 손자 민호(3)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나도 기운을 잃어버렸다.
처음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만 해도 민호는 보통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나도 드디어 할아버지가 됐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굴곡 많은 삶이었지만 이제 손자까지 얻었으니 여한이 없었다. 민호의 재롱을 보며 세상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7개월에 접어들 무렵부터 민호 몸이 뻣뻣하게 굳기 시작하더니 경련도 일으켰다. 용하다는 병원을 다 찾아다녔다. 돌아오는 답변은 한결같았다. 발달장애를 갖고 있으며 자라더라도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지능도 떨어질 것이라는 말 뿐이었다.
3살이지만 민호는 혼자 몸을 뒤척이지 못할 뿐더러 아직 말도 하지 못한다. 밥도 먹을 수 없어 이유식만 삼키고 있을 뿐이다. 매주 두 차례 문경에서 대구까지 민호를 데려와 물리치료를 받는다. 먼 길을 오가며 힘겨워하는 민호를 보면서 우리 부부는 조용히 눈물을 훔친다. 그동안 든 치료비만 2천여만 원. 아깝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더 해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
민호는 따뜻하게 보듬어줄 부모가 없다. 민호가 태어날 무렵 인천에서 일하던 민호 애비(30)는 도박에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했고 가정은 뒷전이었다. 회사도 다닐 수 없게 되더니 곧 빚쟁이를 피해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됐다. 산더미처럼 쌓인 빚은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했다. 알뜰하게 모아둔 돈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이 모성애라는데 집을 나가버린 민호 엄마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 갓 태어난 민호를 남겨두고 민호 애비에게 간다더니 소식이 끊겼다. 생사를 알지 못한 지 이미 3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 호적엔 민호 엄마 이름이 올라 있다. 행여 민호가 정상으로 회복돼 제 엄마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마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미련을 버릴 생각이다. 우리 부부가 애지중지하지만 엄마 사랑을 대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앞으로도 민호에겐 많은 돈이 들 텐데 걱정스럽다. 나 역시 장애인(척추장애 2급)인 탓에 많은 돈을 벌지 못한다. 지난 1985년 문경에서 광부로 일하다 탄광이 무너지는 바람에 다친 뒤 5년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목숨은 건졌지만 불편한 몸은 일하는 데 방해가 됐다. 승합차를 마련해 야간자율학습 후 하교하는 학생들을 태워주고 받은 돈으로 생계를 이었다. 식당일을 나가던 아내는 민호가 태어난 뒤론 일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나와 아내가 힘이 있을 때까지는 항상 민호 옆에 있겠지만 우리가 세상을 떠나버리면 민호는 어떻게 될까. 제 앞가림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천벌 받을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씩 민호 얼굴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속삭인다. '나 죽을 때 데려가도 되겠니? 나 살 때까지만 살자, 민호야.'
장인상 씨와 그의 아내 김순희(50) 씨는 틈만 나면 민호의 몸을 주물러 준다. 굳어있는 몸이 조금이라도 부드러워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애써 밝은 표정을 짓지만 민호를 바라보는 눈에는 서글픔이 가득 묻어있다.
"민호가 회복될 수만 있다면 내 목숨과 바꾸고 싶어요. 늙고 병든 몸이라도 받아주기만 한다면요. 전 정말 능력 없는 할애비입니다. 손자 병 하나 고쳐주지 못하다니. 험난한 세상을 민호가 어떻게 견뎌나갈지 막막할 뿐입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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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발달장애를 겪고 있는 민호(3)는 아직 걸음마는커녕 기본적인 말 한마디 하지 못한다. 할아버지(장인상), 할머니(김순희)는 항상 민호 옆을 지킨다. 그들은 오래 살고 싶어 한다. 적어도 민호가 홀로 세상 밖으로 나설 수 있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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