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1절에 대한민국 사람들은 다시 한번 이 땅에 태어난 감격을 맛보았다. 2006 월드컵 100일 전야를 기념하는 시합에서 국가대표팀이 앙고라와의 결전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날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2002년 여름의 감격을 다시 추억했을 것이다.
당시 예선전에서 한국팀은 미국팀과의 대결에서 1:0으로 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안정환 선수의 통쾌한 슛으로 무승부를 기록하며 16강에 들게 되었다. 안정환 선수는 고울 세레머니에서 언뜻 이해하기 힘든 동작을 보였고, 나머지 선수들도 줄지어 그 동작을 따라했다. 알고 보니 그 전의 쇼트트랙경기에서 반칙한 안톤 오노 선수를 비난하는 세레머니였다. 물론 보다 대범한 세레머니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죽 억울하고 원통했으면 축구대표선수들이 평생에 한번 올까 말까한 월드컵 경기의 감격스런 순간에 그런 야릇한 세레머니를 했을까?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당시의 희생자였던 안현수 선수는 보기 좋게 3관왕에 올랐다. 설욕이라도 하는 듯,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군계일학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안현수는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마치 아무런 앙금도 없는 듯 경기에 몰두하였다. 오직 자신의 트랙을 달리는 초연한 그의 태도는 경기를 넘어서서 진정한 삶의 태도를 느끼게 했다.
안현수에 비해 안톤 오노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반칙왕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500미터 결승전에서 보여준 노련한 부정출발은 어쩌면 미국국적에 일본계라는 개인적 상황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 같았다. 방송중계에서도 언론에서도 그의 부정출발을 거듭 보여주고 비난했지만, 오노는 거리낌 없이 하나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렇게 땄든 저렇게 땄든 금메달은 금메달이다. 메달은 어떻게 목에 걸었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노도 자랑스럽게 두 팔을 번쩍들었는도 모른다. 물론 환호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부정출발의 시비를 걸자는 것은 아니다. 안현수의 4관왕으로 인하여 오노의 부정출발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출발선에 들어서는 선수들의 태도이다. 그것도 특이하게 들어서는 오노의 태도를 지적하고 싶다. 다른 선수들은 그냥 자신의 정해진 자리에 서는 반면에, 오노는 끊임없이 한 팔로 "옆으로 나란히"를 하면서 출발선에 섰다. 재출발하면서도 거듭하여. 너무나 특이한 동작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옆자리의 선수를 팔을 벌린 손끝 밖으로 원천적으로 밀어내는 교묘한 동작이었다. 출발선만 존재하고 옆 선수와의 경계선은 없다는 것을 충분히 활용하는 계산된 동작이었다. 손끝으로 밀어 낼수록 단거리에서는 1번 출발선에 있는 자신이 유리하다는 치밀한 동작이었다. 촌음이라도 빨리 달려 승리하기 보다는 한 치라도 옆 선수를 밀어내어 선점하기 위한 치졸한 동작이었다.
우리네 삶도 어쩌면 경기이다. 출발선만 존재할 뿐, 옆 사람과의 경계는 딱히 정해진 것이 없는 경기와 같다. 어쩌면 누구나 앞만 보고 달리야 하는 힘든 경기이다. 대체로 돈을 벌고 명예를 누리며, 권력을 잡고 쾌락을 즐기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기이다. 그것도 나 혼자만의 목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목표이다. 그렇다면 이런 삶의 경기에서는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과의 경계를 어떻게 정해야 하는 것일까? 첫째는 오노처럼 모든 이웃을 벌린 손끝 밖으로 밀쳐내는 삶의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목표에는 일찍 도달하더라도 공허할 것이다. 오노처럼 제 아무리 승리의 두 손을 번쩍들더라도 밀려난 사람들이 환호해줄 턱이 없다. 둘째는 함께 달리는 삶의 경쟁자를 두 팔의 품에 안고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가 삶의 목표에 도달한다면 품에 안고 온 이웃들이 함께 즐거워하며 그의 승리를 축하할 것이다. 그들도 더불어 목표에 도달하기 때문이리라. 셋째는 함께 고통스런 삶의 경기를 치르는 이웃을 맘에 새기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 삶은 더 이상 경기가 아니라, 승자도 패자도 없는 축복이 될 것이다. 사람은 이웃의 맘속에서 비로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맘속에서 참으로 한 사람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모두가 힘든 삶의 경기에서 "밀치기", "품에 안기" 그리고 "맘에 새기기" 가운데 어느 방식을 택할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리라.
신창석(대구가톨릭대학교 철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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