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이향作 '구겨진 몸'

'구겨진 몸' 이 향

불 피우다 보면

구겨진 종이가 더 잘 탄다

주름살 많은 부채 속, 바람 잡혀 있듯

구겨진 몸에는 통로가 있다

밑바닥까지 굴러본 뒤에야 깊어지는 숨처럼

구석에 쿡, 쳐 박혀봐야

뻑뻑한 등도 굽을 수 있지

그래야 바람을 안을 수 있지

반듯한 종이가 모서리 들이미는 사이

한 뭉치 종이가 불을 먼저 안는다

구겨진다는 것은 바짝 다가선다는 것일까

더 망칠 것 없다는 듯

온 몸으로 불길을 연다

그 얇은 몸으로 불을 살린다

삶의 현실에서 상처 받고 그 상처로 우리의 몸과 정신은 구겨진다. 구겨짐 앞에 절망하거나 두려워 말자. 치열한 삶일수록 현실과 맞서게 되고 그만큼 구겨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때로 현실의 '구석에 쿡, 쳐 박혀 보'기도 해야 '뻑뻑한 등도 굽'히는, '바람을 안을 수 있'는, 깊이와 폭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구겨진다는 것은' 깊이와 폭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이고 완성된 삶(혹은 이상)에 '바짝 다가선다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를 구겨지게 하는 현실의 상처는 이상(불)으로 나아가는 통로(불길)이다. '구겨진 몸에는 통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구겨진 몸만이 통로를 가지는 법'이다.

구석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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