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도 호사 쯤이야"…새 소비트랜드 '작은 명품족'

대학생 최명진(가명·24)씨는 얼마 전 백화점 명품매장에서 30만 원의 고가 화장품 가방을 장만했다. 한달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고스란히 쏟아부은 것.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에 "수백만 원짜리 장신구를 산 것도 아니고, 수천만 원짜리 고급 승용차를 산 것도 아니잖아요. 물론 형편도 안되지만, 일종의 '자기 만족'을 위해 과감한 투자를 하는 셈이죠."

기본적인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사람들은 누구나 약간의 '사치'를 꿈꾼다. 나쁜 의미가 아니다. 같은 물건을 사더라도 좀 더 좋은 것, 좀 더 가치지향적인 제품을 선호한다는 말이다. 소비 수준이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가치 척도가 되고 있다. 쉽게 말해 비싼 물건을 사면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지고, 남들이 시샘과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볼 것이라 믿게 된다.

문제는 돈이다. 대다수 서민들은 백화점 1층 명품 코너에 무슨 바리케이드를 친 것도 아닌데 아예 발걸음도 옮기지 않는다. 괜한 자괴감을 느낄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 층은 다르다. 얇은 지갑이 자신의 존재감마저 희미하게 만드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등장한 새로운 소비 트렌드가 바로 '작은 사치'다. 작아도 좋으니 명품을 택하자는 것이다.

작은 사치가 적용되는 대표적 영역은 최고급 브랜드의 소품류. 롯데백화점 대구점 크리스챤디올 매장. 젊은 층에 특히 어필하는 이 브랜드에서 최근 '작은 사치'의 공략(?) 대상이 되는 품목은 파우치 가방. 화장품류를 담는 작은 가방이지만 가격대는 40만 원 이상. 하지만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 여성들에게 인기다. 디올 로고가 크게 디자인돼 있어 누가 봐도 명품 가방임을 쉽게 알 수 있다는 게 장점. 매장 관계자는 "여학생들이 용돈이나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조금씩 모아 사는 경우가 많다"며 "최근 옷이나 가죽 가방 등 비싼 제품은 살 형편이 못되는 젊은 층들이 지갑, 머플러 등 소품쪽으로 몰리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20, 30대 젊은 층이 많이 찾는 시계 및 액세서리의 대표적인 명품브랜드 알마니. 주로 많이 찾는 제품은 시계 30만 원대, 귀걸이(18만 원), 휴대폰 줄(9만8천 원), 목걸이(23만7천 원) 등이 잘 나간다. 구명진 숍매니저는 "비록 수백만 원짜리 명품 보석반지는 못 사지만 수십만 원짜리 실버제품을 사는 '작은 명품족'들은 그에 못지않게 만족감을 느낀다"고 했다.

동아백화점 쇼핑점 및 수성점 오일릴리 매장의 경우 시계와 코사지, 미니백, 화장품 파우치, 동전지갑 등 색상이 화려하고 독특한 명품소품을 구매하는 고객이 많다. 특히 미니백과 화장품 파우치는 저렴한 가격에 명품을 소유했다는 기분을 누리는 동시에 주위의 시선을 끄는 효과도 충분하다. 버버리 매장의 경우 열쇠고리, 헤어밴드, 넥타이 핀, 카오스버튼, 벨트 등의 소품이 인기다. 특히 헤어밴드의 경우 한눈에 명품임을 알아볼 수 있어 여성에게, 열쇠고리나 넥타이 핀은 남성에게 인기다.

가격대는 시계가 30만 원대에 이를 뿐 나머지 소품류는 20만 원 이내. 오일릴리 코사지는 5만9천 원, 미니백은 14만9천 원, 화장품 파우치는 5만9천 원부터 시작된다. 버버리 헤어밴드는 9만 원부터, 넥타이핀은 17만 원부터 판매되고, 심지어 미소니 양말은 2만9천 원, 팬티는 4만8천 원부터, 페라가모 열쇠지갑은 17만 원, 동전지갑은 9만9천 원부터 판매된다.

동아백화점 패션잡화팀 조만제 부장은 "작은 소품이라도 명품을 구매해 나름대로 패션리더로 인정받고 자기 스타일을 완성하려는 고객들이 늘고 있다"며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소품을 구매해 의상 스타일 등과 맞추면 웬만한 명품족 부럽지 않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고객이 늘어나면서 명품 소품의 매출도 꾸준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

'작은 사치'가 명품류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활 속에서 작은 사치는 두드러지고 있다. 기존 대두유에 비해 10배나 비싼 올리브유가 식용유 시장을 평정한 것도 같은 맥락. 고급 월풀 욕조는 쓸 수 없지만 목욕용품만은 최고급으로 쓰려는 사람도 늘었다. 11만 원이 넘는 목욕용 바디오일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도 마찬가지. 코스메 데코르테 남영애 숍매니저는 "엣센스 제품만큼은 최고급으로 쓰려고 한다"며 "기본 색조 등은 몇 만원짜리를 쓰면서도 엣센스는 수십만 원대 고급품을 선호한다"고 했다.

한편 가격대가 높더라도 소비자들이 날마다 사용하는 제품의 경우, 역시 '작은 사치' 욕구가 발견된다.

김치냉장고는 다른 가전에 비해 고가품이 잘 팔리는 경향이 눈에 띤다. 삼성 하우젠의 다고내, LG전자의 R-D303PN 제품의 경우 180만 원대 고가지만 주부들에게 인기가 높다. 가전매장의 한 관계자는 "비싼 김치냉장고를 사는 주부 중에는 '비롯 돈이 없고 집도 좁지만, 넓은 집을 가진 친구처럼 김치냉장고만큼은 좋은 것을 쓴다'는 생각에 뿌듯해 하는 경우가 적잖다"고 말했다. 휴대폰도 마찬가지. 40만 원대 초콜릿폰이나 70만 원대 DMB폰은 10, 20대에게는 다른 구매를 포기하고서라도 꼭 갖고 싶은 '작은 사치품' 중 하나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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