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10월에 있은 '대구조선은행지점폭탄사건'은 같은 해 12월의 동척(東拓)사건과, 8년 전의 서울 동대문사건, 밀양사건과 함께, 그 무렵 조선내의 4대 폭탄사건 중의 하나로 일제의 간담을 가장 서늘케 한 사건이었다. 대구의 일인고관들과 친일토호들의 목숨을 노린 이 사건의 주역은 1895년 경북 칠곡군 인동에서 태어난 장진홍(張鎭弘)의사였다. 아쉽게도 일본경찰 4명의 중경상자만 내고 체포된 후 사형선고를 받은 장의사는 "왜놈의 손에 교수형을 받을 수 없다"며 1930년 6월 5일, 36세를 일기로 대구형무소에서 자결했다. 옥중에서까지 결사항일의 투지를 내외에 과시하고 분사한 장의사였다.
장의사는 폭탄사건 후 용의주도한 은신술로 일경의 수사망을 따 돌렸다. 그러나 은신 2년 반여 만에 조선인 밀고자와 조선인 고등경찰관에 의해 체포됨으로써 그를 추모하는 인사들의 안타까움을 더하게 했다. 일제가 1936년에 펴 낸 에 따르면 이 사건을 전담한 수사관은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과의 최석현 당시 경부보(警部補)였다. 최 외에, 대구경찰서의 남(南)순사부장과 정(鄭)순사가 있었다. 당시 후꾸다(福田)고등과장 휘하엔 구보다(久保田)란 일인 경부도 있었지만 최석현이 수사반장 역할을 했다.
1893년 경북 봉화에서 출생해, 나중 야마모토 쇼시(山本祥資)로 창씨개명한 최는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叔)지사를 '앉은뱅이'로 만들었을 정도로 독립지사들에 대한 악랄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친 경찰이었다. 이런 공로 등으로, 경시(警視. 총경급)로 진급한 그는 해방직전 강원도의 고등경찰과장이란 막강한 지위에까지 올랐었다. 이들 조선인 고등경찰들의 간계에 의해 저항시인 이육사(李陸史)도 두 아우와 함께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의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육사'란 호도 이 때의 수인번호 64번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란 소제목으로, 최석현이 무용담 삼아 자필한 앞의 '실화집'에 따르면 이 폭탄사건은 한 때 미궁으로 빠질 뻔 했었다. 그것을 최 자신이 후꾸다 고등과장을 설득, 재수사하게 되었으며, 이 후 조선인 '박모'의 결정적인 밀고로 급진전이 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명 '박모'는 뒷날 일본헌병대의 주구노릇을 한 김 아무개로 밝혀졌다. 최의 '무용담'에는 이 외에도 10여명의 남녀조선인들이 수사의 하수인노릇을 톡톡히 한 것처럼 묘사돼 있다. 마치 동족 여럿이 합세하여 한 사람 동족의 고난에 찬 독립투쟁을 짓밟은 형국이다.
사실 일제에 강점된 지 스무 해쯤 되던 이 무렵은 강점초기와는 달리 저들의 교활한 이이제이(以夷制夷)수법이 제법 먹혀드는 세태였다. 회유가 안 통하면 매수요, 그마저 안 되면 협박이었다. 조선 사람을 앞세울수록 일은 수월히 풀렸다.
"--이미 저들의 세상이 되었겠다, 살아보니 그 전이나 지금이나 민초들이 살기는 매한가지더라. 나라가 있을 때도 언제 나랏님이 백성을 보살펴주었더냐.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인들 좀 심했느냐. 그 판에 상놈이다, 백정이다, 하며 사람취급인들 해주었더냐. 독립운동? 말은 좋다만, 하려면 어디 잘 먹고 잘 살은 고관대작, 토호향반네 당신들부터 먼저 해 보슈. 부자 몸조심 한다고, 당신들이 더 친일을 하는데, 힘없고 굶주린 우리 바지저고리인들 내 미는 회유의 손 뭐 땜에 뿌리치겠느냐--"
동족을 등친 무리들의 주장 가운데는 이렇듯 천연덕스러운 항변도 없지 않아 있었다. 장진홍의사의 폭탄투척은 어쩌면 이런 일부 '얍삽빠른' 기회주의자들의 자기합리화논리나 토호향반들의 몸조심 친일에 대한 이중의 경종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느새 세뇌되어 힘을 기른 일제의 충견들에 의해 문턱에서 좌절되고만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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